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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매불망
뚱때
6. 목소리의 정체

풍희가 고개를 서서히··· 저었다.

“싫어.. 포기하고 싶어. 너무 힘들거든.”

- 너의 다짐이 고작 이 정도였느냐?

“나의 다짐?”
- 강해지고 싶다는 너의 다짐이 고작 이 정도였느냐?

“강해지고 싶다는 내 다짐?”

- 그래, 너를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한 너의 다짐.

“나를 이렇게 만든 자들??”

순간 주변이 크게 찌그러지고 펴지고 일그러지며 많은 장소들과 많은 시간들이 흘러 지나갔다.

언제나 강인했던 아버지가 피를 뿜으며 멀어졌고 언제나 따뜻했던 어머니가 피눈물을 흘리며 사라졌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진한 살기를 뿜어대는 복면인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서 있었다.

“뭐야!! 너희들은 뭐냐고!!”

퓩퓩퓩-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복면인들이 마구잡이로 찔렀다.

“으아악!!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움직이려 애썼지만, 이 공간에 묶인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스으윽-

자신에게 다정한 시선을 보내는 어머니를 복면인들이 유린했다.

“으아아!! 죽여버릴 거야 너희를 모두 죽일 거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 써서 공간에 저항했다.

“끄아악!!!”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들리지 않는 상체를 힘겹게 들어보려고 노력
했다.

그렇게 상체를 세우니 자신의 앞에는 손이 뻗어져 있었다.

- 너의 다짐을 느꼈느냐?

“힘을 줘! 나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풍희는 자신을 향해 내밀은 이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어둡기만 했던 공간이 일순 환해지고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꽃으로 가득한 언덕이 되었다.

바람이 내 볼을 어루만져 주었고 꽃잎이 부딪치는 소리는 저마다 다른 매력을 뽐냈다.

그리고 조금씩 보였다. 자신에게 손을 내민 이 남자의 모습이.

투박한 얼굴에 덥수룩한 머리가 먼저 보였고 깊은 눈매가 따라왔다.

날카로운 턱선을 따라서 내려가니 듬직한 어깨가 보였고 그 아래는 뚫렸다.

그 남자의 가슴은 뻥 뚫려 있었다. 

- 내 이름은 한혁진 풍신이다.

“풍신?”

- 그 누구도 너의 허락 없이 너를 건들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

“내 다짐을 이루어줄 수 있어?”

- 그렇다. 그리고 너 또한 내 바람을 들어줘야 한다.

“나를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 좋아. 나를 받아들여라.

순간 한혁진의 모습이 흩어지더니 강한 바람이 되어 불어왔다.

- 너의 바람을 이루어 줄 테니, 너는 나의 바람을 이루어 주거라.

풍희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언제나 너의 곁에 있을 것이다. 네가 나의 바람을 이루어 줄 때까지, 오매불망 그날을 기다릴 것이다. 또 보자꾸나.

이 일이 풍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그저 그 끝을 오매불망 기다릴 뿐이다.

···

희미해지는 목소리가 떠나가고 풍희가 눈을 떴을 때는 천장이 보였다.

부드러운 이불이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고 그 이불은 땀에 젖어 축축했다.

“끄윽!”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한혁진의 기억에 머리가 지끈 아파졌다. 

그의 모든 무공부터 시작해서 그가 믿었던 자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쓸쓸한 죽음을 마주한 일까지 그의 기억이 머릿속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너의 바람을 꼭 이루어 줄게.”

드르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향긋한 꽃내음이 코끝을 자극했다.

“어?! 일어났어요!!”

풍희가 꽃향기를 따라서 시선을 돌리니 그곳에는 꽃 한 송이가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구시죠? 여긴 어디죠?”

“어?? 기억 안 나요?”

“기.. 억? 크으윽!!”

엄청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끊어졌던 기억과 어머니의 죽음 이후의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한꺼번에 자리를 잡았다.

모든 기억의 파편이 하나의 기억으로 맞춰지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버지···어머니···”

풍희로부터 뿜어져 나온 슬픔과 분노가 방안에 가득 맴돌았다.

서서는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서서가 풍희를 보고 느낀 감정은 딱 하나였다.

‘무섭다..’

감정이 없는 것 같은 저 눈빛이며 분노를 못 이겨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몸을 보고 있자니 절로 두려움이 느껴졌다.

“일어났느냐?”

그때 서서를 보러 온 황설횽이 풍희에게 말을 걸었고 서서는 놀라 뒤를 쳐다봤다.

“어? 아빠?”

‘아버지??’

분노와 슬픔이 공존하던 감정이 슬픔으로 모두 바뀌고 차분해졌다.

“풍희입니다. 누구시죠?”

“황설횽이다. 너희 가족에게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지.”

“예??”

“우선 쉬어라. 몸이 괜찮아지면 얘기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자신이 갈 곳은 더 이상 없을뿐더러 은혜를 입었다고 호의를 베푸는 황설횽의 모습은 꽤 신용이 갔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서서와 황설횽이 방을 나가자 풍희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조금도 지체할 수 없어. 복수해야 해.”

한혁진의 기억이 들어오면서 풍희는 심법을 더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졌고 모든 무공의 기본은 내공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 년. 일 년 안에 나가야 해.”

가부좌를 튼 풍희는 바람을 단전으로 모았다. 그렇게 모인 바람은 단전을 거점으로 온몸 구석구석 퍼져갔고 자리를 잡았다.

너무나 상쾌한 기분이 들고 몸이 가벼워졌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창문을 비추던 햇빛은 달빛으로 바뀌었고 밖은 어둠으로 깔렸다.

풍희는 기지개를 켜더니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맞는 자연의 바람은 시원했고 물결이 출렁이는 호수는 아름다웠다.

부모님을 잃은 상처가 다 치유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약해지면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이 아플 것으로 생각하고 태연한 척하고 있는 것뿐이다.

“후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자신의 옆에 누군가 다가와서 앉았다.

“저기.. 안녕??”

풍희가 옆을 보자 아침에 봤던 아름다운 소녀가 앉아있었다.

“그래, 안녕.”

서서는 풍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풍희가 풍기는 이 쓸쓸한 기운을 위로하고 싶었다.

스으윽-

아마 충동적이었을 것이다. 축 처져 아픔을 간직한 풍희의 등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는 충동이 지금 이 상황을 만들었다.

“어.. 어??”

기우뚱한 모습으로 서서에게 기댄 풍희의 모습은 어딘가 엉성해 보였다. 

그런데 풍희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은 위로를 받고 싶었다. 기대서 울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이제 한 명이 생겼다. 자신에게 포근함을 주는 한 명이.

당황한 것은 풍희만이 아니었다. 서서도 자신의 이 충동적 행동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어.. 그.. 저기.. 어···”

서서가 서둘러 밀어내려고 했지만 풍희의 눈에서 흐르는 투명한 눈물이 시야에 들어오자 잠시 이러고 있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찰랑이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따금 튀어 오르는 물고기를 따라서 시선이 만날 뿐 그 어떤 말도 없었다.

훌쩍-

흐르던 슬픔이 진정됐는지 코를 한번 먹은 풍희가 말했다.

“그.. 고마워.”

“어? 아.. 아니야 내가 고마워. 네가 은랑을 구해줬다며?”

“그 늑대의 주인이 너였구나?”

“응! 내 소중한 친구거든. 정말 고마워!”

풍희는 주변에 있던 돌을 주워들고서는 말없이 호수를 향해 가볍게 던졌다.

“저 호수가 보이니?”

“응??”

“잔잔했던 호수에 돌이 끼어들었더니 사납게 요동치는 모습이.”

서서는 풍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우리 가족은 호수였어. 그저 평범하게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었지.”

서서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지만 풍희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돌멩이가 날아왔지. 그리고 그 돌멩이는 내게서 모든 걸 뺏어갔어.”

“그.. 미안해.”

“돌멩이는 잘못이 없어. 멀쩡한 돌멩이를 집어 던진 놈들이 잘못한 거지.”

서서가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풍희를 봤다.

“미안해하지 마. 네 잘못이 아니니까.”

풍희는 주변에 돌을 하나 더 주워 호수로 강하게 던졌다.

“이제 내가 던질 차례거든.”

큼지막한 물방울이 튀어 오르고 떨어지자 호수가 강하게 요동쳤다.

굳게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니 풍희는 정말 굳은 다짐을 하는 것 같았다.

서서가 주변에 작은 돌을 여러 개 줍더니 한꺼번에 호수로 던졌다. 그러자 호수는 작은 물방울이 여러 방향에서 튀어 올랐고 호수의 모양을 일그러트렸다.

“나도 받을 빚이 좀 많아서.”

“하하하. 좋네.”

풍희와 서서는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행동으로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견고한 신뢰가 생긴 것을 마음으로 느꼈다.

···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풍희는 외상도 모두 낫고 심법을 꾸준히 수련해서 그런지 내공도 많이 쌓였다.

똑똑-

“희야!”

이제 제법 친해진 서서가 친근하게 말을 걸며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 들어오라고 말하지는 않은 거 같은데 말이지?”

“에이! 뭐 어때. 그것보다 오늘 아빠가 보자셔!”

“그래? 알겠어.”

“응! 저녁에 같이 식사해야 하니까 그전까지 나랑 수련하자!”

“지금 나는 검법을 펼칠 수 없는데?”

“에이 옆에서 봐주기만 해도 좋다구!”

서서가 풍희의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풍희의 얼굴을 스치자 향기로운 냄새가 다가와 마음을 홀린다.

“그래. 가자 가.”

서서는 열다섯으로 풍희보다 한 살 많았지만 개의치 않고 친구가 되었고 그 둘은 짧은 시간에 매우 친해졌다. 아마 같은 목표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서서와 풍희가 온 곳은 황금장 내에 있는 커다란 연무장이었다.

이곳은 서서가 혼자 사용하는 곳으로 조용했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서 수련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서서에게 끌려온 풍희는 익숙한 듯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서서는 목검을 들고 그 앞에 섰다.

“후우..”

서서의 기세가 순간 바뀌었다. 서서가 익힌 검법은 용수검법으로 서서의 스승인 용무의 비전 검법이었다.

용의 손이라는 검법은 쉴 새 없이 강한 내공으로 상대를 밀어붙이는 공격 초식이 많은 패도적인 검법이다.

서서가 천재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서서의 주변으로 큰 내공의 흐름이 일어났고 그 내공은 작게나마 일렁였다.

“제 삼식 삼수용수!”

날카로운 용의 손톱을 연상시키는 검이 세 방향의 허공을 빠르게 찔렀다.

쿠콰쾅!!

세 방향으로 찔러나간 발톱은 허공을 찢으며 바닥까지 파 버렸다.

위력이 큰 만큼 서서도 적지 않은 내공을 소모했는지 흐르는 땀을 닦으며 풍희에게 물었다.

“어땠어?”

“음.. 나쁘지 않아.”

“에??!! 겨우 그 정도야!? 이번에는 자신 있었는데!”

풍희가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그 목검 나한테 줘 볼래?”

“괜찮아??”

“응. 많이 괜찮아져서 한 번은 괜찮을 거 같아.”

서서는 들고 있던 목검을 풍희에게 건네줬다.

풍희는 목검을 잡자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면서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할 수 있을 거 같아. 잘 봐.”

풍희가 목검을 치켜들고서 눈을 감자 주변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풍희의 목검이 바람의 기운을 담고 또 담았다.

서서가 검법을 펼치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자세를 잡고 그대로 허공에 내질렀다.

휘오오 쾅쾅!

세 방향으로 날아간 날카로운 바람은 공간을 찢었다는 표현이 맞을 거 같았다. 땅이며 하늘이 모두 찢기는 것 같았다.

“대단해···”

“후우.. 이거 이상은 못하겠다.”

“어떻게 한 거야!?”

“설명하기 힘든데··· 음··· 그냥··· 바람을 담았어.”

“바람을??”

풍희가 목검을 서서에게 다시 건네고 서서의 자세를 잡아주었다.

“내가 이끄는 대로 해봐.”

풍희가 바람을 불러 서서의 몸에 둘렀고 그 바람을 천천히 검에 두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서는 모든 감각을 깨우고 풍희의 바람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 바람은 자신의 발끝부터 서서히 올라가더니 검으로 향했고 그 바람은 검을 덮고 있는 것이 아닌 검을 둘러싸고 회전했다.

풍희는 부드럽게 서서의 팔을 앞으로 유도했다.

쾅!!!

비록 한 방향으로 날아간 거지만 그 위력은 세 방향으로 날아간 기운을 합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서서는 새로운 눈을 뜬 것 같았다.

“아직 내가 약해서 이 정도까지 밖에 못 도와줘서 미안해.”

“아니야 충분히 도움이 됐어! 고마워.”

풍희는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서서를 빤히 쳐다보다가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다시 자리로 가서 앉았다.

두근-

“한 번 더 봐줘야 해!!”

“알겠어. 얼른 해봐.”

노을빛이 반사돼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서서의 볼이 노을빛처럼 붉게 변했다.
퍼가기
오매불망
뚱때
6. 목소리의 정체

풍희가 고개를 서서히··· 저었다.

“싫어.. 포기하고 싶어. 너무 힘들거든.”

- 너의 다짐이 고작 이 정도였느냐?

“나의 다짐?”
- 강해지고 싶다는 너의 다짐이 고작 이 정도였느냐?

“강해지고 싶다는 내 다짐?”

- 그래, 너를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한 너의 다짐.

“나를 이렇게 만든 자들??”

순간 주변이 크게 찌그러지고 펴지고 일그러지며 많은 장소들과 많은 시간들이 흘러 지나갔다.

언제나 강인했던 아버지가 피를 뿜으며 멀어졌고 언제나 따뜻했던 어머니가 피눈물을 흘리며 사라졌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진한 살기를 뿜어대는 복면인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서 있었다.

“뭐야!! 너희들은 뭐냐고!!”

퓩퓩퓩-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복면인들이 마구잡이로 찔렀다.

“으아악!!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움직이려 애썼지만, 이 공간에 묶인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스으윽-

자신에게 다정한 시선을 보내는 어머니를 복면인들이 유린했다.

“으아아!! 죽여버릴 거야 너희를 모두 죽일 거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 써서 공간에 저항했다.

“끄아악!!!”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 들리지 않는 상체를 힘겹게 들어보려고 노력
했다.

그렇게 상체를 세우니 자신의 앞에는 손이 뻗어져 있었다.

- 너의 다짐을 느꼈느냐?

“힘을 줘! 나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풍희는 자신을 향해 내밀은 이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어둡기만 했던 공간이 일순 환해지고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꽃으로 가득한 언덕이 되었다.

바람이 내 볼을 어루만져 주었고 꽃잎이 부딪치는 소리는 저마다 다른 매력을 뽐냈다.

그리고 조금씩 보였다. 자신에게 손을 내민 이 남자의 모습이.

투박한 얼굴에 덥수룩한 머리가 먼저 보였고 깊은 눈매가 따라왔다.

날카로운 턱선을 따라서 내려가니 듬직한 어깨가 보였고 그 아래는 뚫렸다.

그 남자의 가슴은 뻥 뚫려 있었다. 

- 내 이름은 한혁진 풍신이다.

“풍신?”

- 그 누구도 너의 허락 없이 너를 건들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

“내 다짐을 이루어줄 수 있어?”

- 그렇다. 그리고 너 또한 내 바람을 들어줘야 한다.

“나를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 좋아. 나를 받아들여라.

순간 한혁진의 모습이 흩어지더니 강한 바람이 되어 불어왔다.

- 너의 바람을 이루어 줄 테니, 너는 나의 바람을 이루어 주거라.

풍희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언제나 너의 곁에 있을 것이다. 네가 나의 바람을 이루어 줄 때까지, 오매불망 그날을 기다릴 것이다. 또 보자꾸나.

이 일이 풍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그저 그 끝을 오매불망 기다릴 뿐이다.

···

희미해지는 목소리가 떠나가고 풍희가 눈을 떴을 때는 천장이 보였다.

부드러운 이불이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고 그 이불은 땀에 젖어 축축했다.

“끄윽!”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한혁진의 기억에 머리가 지끈 아파졌다. 

그의 모든 무공부터 시작해서 그가 믿었던 자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쓸쓸한 죽음을 마주한 일까지 그의 기억이 머릿속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너의 바람을 꼭 이루어 줄게.”

드르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향긋한 꽃내음이 코끝을 자극했다.

“어?! 일어났어요!!”

풍희가 꽃향기를 따라서 시선을 돌리니 그곳에는 꽃 한 송이가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구시죠? 여긴 어디죠?”

“어?? 기억 안 나요?”

“기.. 억? 크으윽!!”

엄청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끊어졌던 기억과 어머니의 죽음 이후의 기억들이 머릿속으로 한꺼번에 자리를 잡았다.

모든 기억의 파편이 하나의 기억으로 맞춰지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버지···어머니···”

풍희로부터 뿜어져 나온 슬픔과 분노가 방안에 가득 맴돌았다.

서서는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서서가 풍희를 보고 느낀 감정은 딱 하나였다.

‘무섭다..’

감정이 없는 것 같은 저 눈빛이며 분노를 못 이겨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몸을 보고 있자니 절로 두려움이 느껴졌다.

“일어났느냐?”

그때 서서를 보러 온 황설횽이 풍희에게 말을 걸었고 서서는 놀라 뒤를 쳐다봤다.

“어? 아빠?”

‘아버지??’

분노와 슬픔이 공존하던 감정이 슬픔으로 모두 바뀌고 차분해졌다.

“풍희입니다. 누구시죠?”

“황설횽이다. 너희 가족에게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지.”

“예??”

“우선 쉬어라. 몸이 괜찮아지면 얘기하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자신이 갈 곳은 더 이상 없을뿐더러 은혜를 입었다고 호의를 베푸는 황설횽의 모습은 꽤 신용이 갔기 때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서서와 황설횽이 방을 나가자 풍희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조금도 지체할 수 없어. 복수해야 해.”

한혁진의 기억이 들어오면서 풍희는 심법을 더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졌고 모든 무공의 기본은 내공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 년. 일 년 안에 나가야 해.”

가부좌를 튼 풍희는 바람을 단전으로 모았다. 그렇게 모인 바람은 단전을 거점으로 온몸 구석구석 퍼져갔고 자리를 잡았다.

너무나 상쾌한 기분이 들고 몸이 가벼워졌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창문을 비추던 햇빛은 달빛으로 바뀌었고 밖은 어둠으로 깔렸다.

풍희는 기지개를 켜더니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맞는 자연의 바람은 시원했고 물결이 출렁이는 호수는 아름다웠다.

부모님을 잃은 상처가 다 치유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약해지면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이 아플 것으로 생각하고 태연한 척하고 있는 것뿐이다.

“후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때 자신의 옆에 누군가 다가와서 앉았다.

“저기.. 안녕??”

풍희가 옆을 보자 아침에 봤던 아름다운 소녀가 앉아있었다.

“그래, 안녕.”

서서는 풍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풍희가 풍기는 이 쓸쓸한 기운을 위로하고 싶었다.

스으윽-

아마 충동적이었을 것이다. 축 처져 아픔을 간직한 풍희의 등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는 충동이 지금 이 상황을 만들었다.

“어.. 어??”

기우뚱한 모습으로 서서에게 기댄 풍희의 모습은 어딘가 엉성해 보였다. 

그런데 풍희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은 위로를 받고 싶었다. 기대서 울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이제 한 명이 생겼다. 자신에게 포근함을 주는 한 명이.

당황한 것은 풍희만이 아니었다. 서서도 자신의 이 충동적 행동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어.. 그.. 저기.. 어···”

서서가 서둘러 밀어내려고 했지만 풍희의 눈에서 흐르는 투명한 눈물이 시야에 들어오자 잠시 이러고 있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찰랑이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따금 튀어 오르는 물고기를 따라서 시선이 만날 뿐 그 어떤 말도 없었다.

훌쩍-

흐르던 슬픔이 진정됐는지 코를 한번 먹은 풍희가 말했다.

“그.. 고마워.”

“어? 아.. 아니야 내가 고마워. 네가 은랑을 구해줬다며?”

“그 늑대의 주인이 너였구나?”

“응! 내 소중한 친구거든. 정말 고마워!”

풍희는 주변에 있던 돌을 주워들고서는 말없이 호수를 향해 가볍게 던졌다.

“저 호수가 보이니?”

“응??”

“잔잔했던 호수에 돌이 끼어들었더니 사납게 요동치는 모습이.”

서서는 풍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우리 가족은 호수였어. 그저 평범하게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었지.”

서서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지만 풍희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돌멩이가 날아왔지. 그리고 그 돌멩이는 내게서 모든 걸 뺏어갔어.”

“그.. 미안해.”

“돌멩이는 잘못이 없어. 멀쩡한 돌멩이를 집어 던진 놈들이 잘못한 거지.”

서서가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풍희를 봤다.

“미안해하지 마. 네 잘못이 아니니까.”

풍희는 주변에 돌을 하나 더 주워 호수로 강하게 던졌다.

“이제 내가 던질 차례거든.”

큼지막한 물방울이 튀어 오르고 떨어지자 호수가 강하게 요동쳤다.

굳게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니 풍희는 정말 굳은 다짐을 하는 것 같았다.

서서가 주변에 작은 돌을 여러 개 줍더니 한꺼번에 호수로 던졌다. 그러자 호수는 작은 물방울이 여러 방향에서 튀어 올랐고 호수의 모양을 일그러트렸다.

“나도 받을 빚이 좀 많아서.”

“하하하. 좋네.”

풍희와 서서는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행동으로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견고한 신뢰가 생긴 것을 마음으로 느꼈다.

···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풍희는 외상도 모두 낫고 심법을 꾸준히 수련해서 그런지 내공도 많이 쌓였다.

똑똑-

“희야!”

이제 제법 친해진 서서가 친근하게 말을 걸며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 들어오라고 말하지는 않은 거 같은데 말이지?”

“에이! 뭐 어때. 그것보다 오늘 아빠가 보자셔!”

“그래? 알겠어.”

“응! 저녁에 같이 식사해야 하니까 그전까지 나랑 수련하자!”

“지금 나는 검법을 펼칠 수 없는데?”

“에이 옆에서 봐주기만 해도 좋다구!”

서서가 풍희의 손을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풍희의 얼굴을 스치자 향기로운 냄새가 다가와 마음을 홀린다.

“그래. 가자 가.”

서서는 열다섯으로 풍희보다 한 살 많았지만 개의치 않고 친구가 되었고 그 둘은 짧은 시간에 매우 친해졌다. 아마 같은 목표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서서와 풍희가 온 곳은 황금장 내에 있는 커다란 연무장이었다.

이곳은 서서가 혼자 사용하는 곳으로 조용했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서 수련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서서에게 끌려온 풍희는 익숙한 듯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서서는 목검을 들고 그 앞에 섰다.

“후우..”

서서의 기세가 순간 바뀌었다. 서서가 익힌 검법은 용수검법으로 서서의 스승인 용무의 비전 검법이었다.

용의 손이라는 검법은 쉴 새 없이 강한 내공으로 상대를 밀어붙이는 공격 초식이 많은 패도적인 검법이다.

서서가 천재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서서의 주변으로 큰 내공의 흐름이 일어났고 그 내공은 작게나마 일렁였다.

“제 삼식 삼수용수!”

날카로운 용의 손톱을 연상시키는 검이 세 방향의 허공을 빠르게 찔렀다.

쿠콰쾅!!

세 방향으로 찔러나간 발톱은 허공을 찢으며 바닥까지 파 버렸다.

위력이 큰 만큼 서서도 적지 않은 내공을 소모했는지 흐르는 땀을 닦으며 풍희에게 물었다.

“어땠어?”

“음.. 나쁘지 않아.”

“에??!! 겨우 그 정도야!? 이번에는 자신 있었는데!”

풍희가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그 목검 나한테 줘 볼래?”

“괜찮아??”

“응. 많이 괜찮아져서 한 번은 괜찮을 거 같아.”

서서는 들고 있던 목검을 풍희에게 건네줬다.

풍희는 목검을 잡자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면서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할 수 있을 거 같아. 잘 봐.”

풍희가 목검을 치켜들고서 눈을 감자 주변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풍희의 목검이 바람의 기운을 담고 또 담았다.

서서가 검법을 펼치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자세를 잡고 그대로 허공에 내질렀다.

휘오오 쾅쾅!

세 방향으로 날아간 날카로운 바람은 공간을 찢었다는 표현이 맞을 거 같았다. 땅이며 하늘이 모두 찢기는 것 같았다.

“대단해···”

“후우.. 이거 이상은 못하겠다.”

“어떻게 한 거야!?”

“설명하기 힘든데··· 음··· 그냥··· 바람을 담았어.”

“바람을??”

풍희가 목검을 서서에게 다시 건네고 서서의 자세를 잡아주었다.

“내가 이끄는 대로 해봐.”

풍희가 바람을 불러 서서의 몸에 둘렀고 그 바람을 천천히 검에 두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서는 모든 감각을 깨우고 풍희의 바람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 바람은 자신의 발끝부터 서서히 올라가더니 검으로 향했고 그 바람은 검을 덮고 있는 것이 아닌 검을 둘러싸고 회전했다.

풍희는 부드럽게 서서의 팔을 앞으로 유도했다.

쾅!!!

비록 한 방향으로 날아간 거지만 그 위력은 세 방향으로 날아간 기운을 합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서서는 새로운 눈을 뜬 것 같았다.

“아직 내가 약해서 이 정도까지 밖에 못 도와줘서 미안해.”

“아니야 충분히 도움이 됐어! 고마워.”

풍희는 해맑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서서를 빤히 쳐다보다가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다시 자리로 가서 앉았다.

두근-

“한 번 더 봐줘야 해!!”

“알겠어. 얼른 해봐.”

노을빛이 반사돼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서서의 볼이 노을빛처럼 붉게 변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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