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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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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1
진현이 돌아온 후, 다시 출근할 때까지 은하는 밝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나잇대의 말 하기 내키지 않는 고민이 있으려니 싶었다.
그보다 진현에겐 자고 일어난 후 찾아온 근육통이 더 문제였다. 
마루에서 눈을 뜬 진현은 마치 가위가 눌린 듯 몸을 일으키기가 버거웠다. 잔뜩 알이 배긴 것이다.

"아윽... 으. 아... 아으."

앓는 소리를 내며 진현은 어제 아침 삼촌의 이상야릇하게 터져 나온 목소리를 떠올렸다. 
야속하게도 빛나는 태양이 진현의 등 뒤를 비추며 출근을 보챘다.

"오빠, 왜. 또 퇴마 당하는 중이야?"

안방에서 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보단 나은 목소리였다. 
보기엔 잔뜩 침울해져 있었는데, 그저 하룻밤 걱정거리였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아... 우리 파스 없지?"

"파스? 없지. 지금 사올까?"

"...됐어. 놔둬 그냥."

한숨을 쉰 진현은 상체를 일으키려 애썼다. 어제의 칭찬이 무색하게도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스로가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아침... 아침은 너 알아서 먹어. 어제 장 본 거 있으니까... 난 좀 씻고 바로 나가봐야겠다."

"내가 차릴게, 오빠. 같이 먹고 가."

슬쩍 핸드폰을 본 진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늦었어. 저녁이나 같이 먹자."

"이미 늦었으면 아예 먹고 늦지."

아쉬워하는 은하의 목소리가 안방에서 새어 나왔다. 
진현은 피식하고는 젖먹던 힘을 짜내어 간신히 일어섰다. 그 기세가 지나쳤는지 다리 중심을 잃고 휘청일 뻔했다.

`무슨, 하루 일했다고 이러냐.`

몸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진현은 출근 준비를 하며 오늘은 좀 덜 힘든 하루가 되길 바랐다.



출근한 진현은 삼촌에게 들러 파스라도 얻어갈까 했지만, 너무 자주 들락날락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팔과 어깨는 여전히 욱신거렸다. 입술을 앙다문 채 진현은 교무실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오, 진현씨."

교감이 출근한 진현을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잡무용 신입 직원을 이렇게나 격하게 반겨주는 이유를 알고 있기에 더 불편할 뿐이었다.
"어제, 창고 가보니까 진짜 깔끔하게 해놨더라구요. 우리 황 선생님이 진현씨 칭찬 엄청 하던데, 힘 쓰는 데에 제격이시라고?"

"제, 제가요?"

"땀만 좀 흘리고. 지치지도 않는다고. 학교 교직원 중에 진현씨 처럼 힘 좋은 장사가 필요했는데, 잘 됐어요."

교감의 거듭된 칭찬에 진현은 확실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흐름을 군대 시절에서 겪은 적이 많았다. 
이대로라면 곧.

"오늘은 황 선생님이 다른 일이 있어 갖구요. 저 바깥에 학교 소유 공터가 하나 있는데, 거기 폐자재들이 쌓여 있는데."

"아. 지ㄹ."

감탄사가 터져 나올뻔한 진현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어 입을 막았다. 
다행히 사람들의 업무 대화에 묻혀 교감의 귀에는 들리지 않은듯했다.

"거기서 정리해놓고 계시면, 업자분께서 수거하러 오실 겁니다. 그거랑 또..."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진현의 속에선 핵전쟁이라도 일어나는 듯 위장이 분열하는 느낌이었다. 그거랑 또. 또. 또.
진현이 자랑스럽다는 듯 교감은 할 일을 계속해서 나열하고 있었다. 
학교 보안관을 도와서 주위 순찰하기. 교내봉사 중인 학생 `감시`하기. 매점 냉장고 옮기기 등등 끝날 줄을 몰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실마다 형광등 체크하고, 갈 거 있으면 갈고. 끝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흐뭇해 하는 교감에게 진현이 넌지시 물었다.

"오늘 다 하는 거 아니죠? 뭐 우선순위가 있습니까? 급한 거."

"오늘 할 일입니다. 진현씨."

진현은 귀를 의심했다.

"전부 다요?"

"그럼요."



교문 밖을 터덜터덜 내려가는 진현의 발걸음은 쇳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실제로도 욱신거리는 몸을 견뎌가며 무게가 쏠리는 대로 걸어가는 중이었으니까.
`우리 황 선생님이 진현씨 칭찬 엄청 하던데.` 교감의 말을 곱씹던 진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민초 먹는 거 꼽 좀 줬다고 엿으로 갚네.`

잘 달궈진 아스팔트 길을 따라 내려가는 진현은 어느새 땀이 비 오듯 나고 있었다. 저 너머에 흡연장이자 목적지인 공터가 보였다.
일단 도착하면 담배 한 대부터 태워야겠다는 일념으로 묵묵히 걸어갔다.

공터에 다다르면서 어제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폐자재 더미가 실감 났다. 
거진 세 트럭쯤 될 법했다. 책걸상, 교탁, 금이 가거나 유리가 깨진 TV등.
말이 공터고 폐자재 더미였지, 곳곳에 담배꽁초와 쓰레기들로 화려하게 장식해 놓은 쓰레기 매립장이었다.
진현은 그 더미에 압도되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럴 땐 한 대 태우고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그늘로 피할 겸 눈을 돌려 어제의 그 비탈길로 향했다.

진현이 힘을 내려놓고 터벅터벅 내려가며 발소리를 내자 언덕 아래, 폐기물 더미 안쪽에서 또다시 인기척이 났다.
어제의 그 학생이었다. 또 몰래 흡연 중이었다. 잠시 밖을 살피던 그녀는 진현을 알아보고는 살짝 몸을 가렸지만, 그가 오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또 불 필요하세요?"

말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 진현이 누군지 알아채고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낸 후 한숨을 쉬었다.

"아뇨. 챙겨왔어요."

멋쩍은 얼굴을 하던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폐자재 안으로 숨어들었다. 
진현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조용히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선...생님? 이신가요?"

안쪽에서 확신 없고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현은 피식 웃었다.

"그냥 잡무 직원이요. 이거 폐기물 쌓인 거 치우러 왔어요."

"어제 일은..."

"아, 말 안 했어요.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인데."

학생은 길게 늘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긴 후 새침하게 말했다.

"아뇨. 감사하다구요. 또 걸리면 정학 각인데."

진현은 말을 아꼈다. `근데도 또 펴?`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같은 흡연자로서 참기 힘들 거란 생각을 했다.
말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학생이 입을 열었다.

"...진짜 안 하신 거죠?"

"속고만 사셨나."

"네, 어른들이 그렇잖아요."

마치 많이 속아봤고, 그것이 자랑스럽기라도 하는듯한 말투였다.

"근데, 아저씨는 안 그렇네요. 아직은요. 초면에 존대해주는 거도. 라이터 막 뺏어가지도, 휙 던져 주지도 않고."

능청스럽게 웃으며 담배를 빠는 학생은 세속에 찌든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현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디 아파요?"

"아뇨?"

"약간 중2병 증상 있는데."

학생의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귀까지 익을 지경이었다. 진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그쪽 선생도 아니고, 친분이 있는 거도 아닌데. 하대하고 훈계질하고 그럴 이유가 있겠어요? 다 지 인생 사는 거지."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사람 못 봤는데. 아저씨 말이 맞네요. 다 자기 인생인데 뭐 그리 꼰대질하는지 몰라요."

웃음이 터지려고 하는 걸 간신히 참아낸 진현은 어금니를 살짝 물고 답했다.

"근데, 학생이면 선생님 지도하는 거 따르는 게 맞지 않아요?"

"선생님이 꼭 옳은 건 아니잖아요."

너무나 당당하게 얘기하는 학생을 보자 진현은 그만 크읍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비웃는 거에요?"

"아니, 아니."

손사래를 치는 진현을 화난 눈으로 쳐다보던 학생이 말했다.

"다 똑같애. 다. 어차피 나 교내봉사 중인 거 감시하러 온 거죠? 뭐 치운다고 한 거는 다 뻥카 친 거고."

"아니, 난 그쪽이 교내봉사하는지도 몰랐는데, 세상 너무 피곤하게 사시네. 말했잖아요. 난 여기 일이 있는 거라고."

진현은 헛웃음을 날리며 학생을 뒤로하고 언덕에 올라섰다.

"구라같으면 거 있으면서 보시든가. 나 일 해야 하니까 방해하지 마시고. 그쪽은 담배나 마저 맛있게 피세요."

진현을 등 뒤에서 바라보는 학생이 조심스럽게 언덕 위로 올라섰다. 
마치 따라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또 한 번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말했다.

"어차피. 저도 여기 꽁초 주워야 하는데, 하는 김에 같이 해요."

"아니, 난 꽁초 줍는 일 안 하는데요."

"그럼요?"

"이거 같이 옮길래요. 그럼?"

진현이 장갑 낀 손으로 버려진 TV 하나를 텅 소리가 나도록 쳤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학생은 TV와 진현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꽁초나 주울게요."



진현은 업자가 오면 그때 쌓아줘도 될 폐기물들이 왜 정리가 필요했는지 실감했다.
마치 파마머리에 참빗이 얽힌 마냥 이리저리 쓰레기와 한데 묶인 폐기물들은 그 속에서 `파낼` 필요가 있었다.
진현이 쓰레기 더미를 헤집을 때마다 오랫동안 봉인되어 인간의 악의가 가득 흐르는 냄새들이 코를 강타했다.

"어우, 씹!"

감탄하며 고개를 뒤로 젖힌 진현을 본 학생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웃겨요?"

"개 웃겨요."

꽁초가 한가득 담긴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던 학생이 마냥 재밌다는 듯 밝게 웃었다.

"그래도, 요새 한창 우울했는데. 아저씨가 좀 웃겨주네요."

"그래요. 중2병이 힘들지."

"아! 좀! 아닌데!"

"원래 걸린 본인은 몰라요."

"아니라고!"

"어, 막 말 놓네."

"아니라고요!"

겸연쩍게 웃으며 말을 정정하는 학생을 보고 진현 역시 짓궂게 웃었다. 슬픔과 무력감, 죄의식에 가려있었지만, 이것이 진현의 본래 성격이었다.
은하를 만난 후 며칠뿐이었지만 그를 삭히던 그림자가 걷혀 가는 듯했다.
진현의 팔뚝은 힘줄이 가득 돋았고 땀으로 반짝였다. 알이 배긴 몸으로 이를 악물고 묻혀있던 책상을 꺼내는 모습을 보며 학생의 눈이 반짝였다.

"아저씨, 힘 진짜 쎄네요."

"아, 그런 얘기 하지 마요. 나 불안하거든."

"왜요?"

진현은 어제 창고에서 잔뜩 힘썼던 기억을 떠올렸다.

"사회에선 힘 쎈 척 하면 손해라."

이마에서 배어 나오는 땀이 진현의 눈가로 맺혔다. 마치 눈물을 흘리는듯했다.

"학교에선 힘 쎄고 잘 노는 게 최곤데."

"그거, 학교 벗어나면 다 나가리 되는 거 알지 않아요?"

"그런 거 알면 그러고 있겠어요?"

"그쪽은 그래도 좀 아는 거 같길래. 원래 그 병 걸린 사람들이 그렇게 정신승... 아니, 미래를 대비하니까."

"아, 중2병 아니라구요."

눈가를 닦으며 진현이 비웃었다. 입가에 웃음이 가득 띤 진현은 꼭 잔뜩 웃어서 눈물이 나기라도 한 모습이었다.

"그럼 뭔데. 왜 그 나잇대 되면 다 막 세상 좆같고, 우울하고. 밖에 나와보면 차라리 학교 있을 때가 낫다고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닌데?"

"다들 그렇게 얘기했어요. 근데, 우리도 우리 나름 고민도 있고 그런 걸 왜 몰라주나 몰라요? 자기들도 그런 시기 다 보냈잖아요?"

"왜겠어요. 그 고민. 학교 졸업하고, 나이 먹고 나니까 다 조또 아니니까."

진현이 군 생활을 떠올리며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나도, 막 그때야 세상이 막 다 싫고, 모든게 못마땅하고. 그랬는데... 군대 가서 40키로 군장 메고 산등성이 몇십 키로를 뛰가는데. 와..."

"틀."

회상하던 진현은 갑자기 날아와 박힌 단어에 발끈했다.

"틀딱 아니라고!"

"저도 중2병 아니거든요?"

"그래요. 그렇다 칩시다."

"그래요. 아저씨도 틀 아니라고 쳐요."

"거 참."

한마디도 지지 않는 학생을 보고 진현은 은하가 떠올라 피식 웃었다.

"왜요."

"아니, 그냥. 동생 생각나서요. 여기 학생인데."

"나이 차 개 많이 나겠다. 몇 살인데요?"

"이제 열일곱이랬나? 이 학교 1학년."

"핫핑크들이네."

"핫...? 왠."

"1학년 타이 색이요."

자신의 타이 색깔을 가리키는 학생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엿보였다. 그녀의 타이 색은 남색이었다.

"그쪽은 몇 학년인데요."

"2. 학. 년."

또박또박 끊어서 말하는 학생에겐 자부심까지 느껴졌다.

"틀."

"어어?"

진현의 입에서 틀 이란 소리가 나오자 학생이 적잖게 당황했다.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진현이 이때라고 싶어 추가타를 날렸다.

"중2병 아니고 고2병이었네."

"아, 개짜증 나 진짜."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입가는 잔뜩 웃음 짓고 있었다. 이윽고 머리를 귀 뒤로 넘긴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설이에요."

뜬금없게 무슨 소리냐는 듯 진현이 쳐다봤다.

"이. 설. 서리라고 불러요, 다들."

"왜요?"

"자꾸 그쪽. 그쪽. 중2병. 그러지 말구요. 제 이름 불러달라구요."

"뭐 부를 일 있어요? 앞으로 또 얼마나 마주친다고."

"아, 이 학교 직원이라면서요! 볼 때마다 아는 척 좀 해달라구요."

"친구 없구나?"

"아니."

헛웃음을 치는 서리가 땀으로 범벅이 된 진현의 등을 살짝 쳤다. 손에 잔뜩 땀이 묻자 질겁한 듯 손을 뺐지만, 딱히 불쾌해 보이진 않았다.

"알았어요. 이서리씨. 이제 각자 할 일 합시다."

때마침 트럭 한 대가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진현은 다시 쓰레기더미로 뛰어들었고, 서리는 잠시 눈웃음을 치더니 꽁초를 열심히 집게로 주워담기 시작했다.



"나 왔어."

간신히 퇴근한 진현이 기진맥진하며 현관을 열고 마루에 쓰러졌다. 그 옆에선 은하가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고생했어, 오빠."

땀범벅이 된 진현의 등을 팡팡 치는 은하가 웃으며 반겼다.

"힘들었나 봐?"

"말도 마라. 삼촌이 일부러 시킨 건지, 아니면 뭔지. 어제 첫 출근부터 그냥 상하차 뛰는 느낌인 게. 그래, 원래 일하는데 봐주면서 하면 안 되긴 하는데 말야."

주절주절 떠드는 진현은 은하가 듣는지는 상관없었다. 일단 속에 쌓인 것을 잔뜩 토해내고 싶었다.
응. 응. 그래. 하며 추임새를 넣는 은하의 반응을 보지도 않은 채 이틀 동안 느낀 감상평을 허공에 제출했다. 
제풀에 지친 진현은 몸을 뒤집더니 마룻바닥을 몸으로 걸레 질 하듯 잔뜩 땀을 묻혔다.

"으아."

은하가 질겁하며 진현을 뒤집으려 애썼다. 진현은 부들거리며 밀쳐내는 은하가 가소롭다는 듯 버텼다. 
이내 포기한 은하는 진현을 샤워기 앞으로 끌고 가려는 듯 팔을 잡고 끌어대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어, 갈게. 일어난다. 일어나."

피식 웃은 진현이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진현이 누워있던 자리는 물기가 사람 모양으로 번져있었다.

"오빠한테 들어간 악령이 저기에 나왔어."

눈을 휘둥그레하게 뜬 은하가 감탄했다. 멋쩍은 진현은 걸레를 집어 땀 자국을 닦아내고는 도망치듯 화장실로 들어갔다.

비교적 짧은 시간이 흐른 후, 샤워를 마치자 진현은 잠이 쏟아졌다. 
이틀 동안의 강도 높은 업무로 몸과 마음이 다 지쳐버렸다. 노곤한 기운이 머리를 잠식하는 가운데, 눈을 가느다랗게 뜬 진현이 가까스로 입을 뗐다.

"나, 좀 먼저 뻗을라고. 저녁은... 알아서 먹을래?"

"또?"

"내일 일찍 일어나서 같이 먹자. 내가 너무... 졸려. 피곤해..."

"...알겠어."

뭔가 말하려다 망설이던 은하는 벌써 마루에 반쯤 누워 그대로 곯아떨어진 진현을 보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고 마루에 깐 뒤 진현의 팔을 질질 끌어 겨우 눕혔다.
그녀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복잡한 표정을 지은 은하는 진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날이 어둑해지는 동안 은하는 진현이 자는 옆을 지켰다. 옆에서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잠깐 켜서 화면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떨궜다.
잘만 자는 진현이 야속하기라도 한 듯 슬픈 눈빛을 보였다.
이윽고 해가 완전히 저물어 밤이 찾아오는 동안 은하는 계속 진현의 옆에서 앉아있었다. 애틋함과 안타까움, 걱정이 섞인 표정이었다.
가는 손가락을 튕겨 얇은 이불을 걷어내길 몇 차례. 은하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굳은 표정으로 메시지를 확인하던 은하는 안절부절못한 몸짓을 보였다. 손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은하는 이내 결심한 듯 진현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일어섰고, 조용히 진현을 지나쳐 그가 깨지 못하도록 현관을 살짝 열고 나갔다.



"그래도 꼴에 지 남친이라고. 소중한 갑지?"

건물 밖을 나서자마자 은하는 이전 룸메이트였던 그녀와 함께 찾아온 패거리들과 마주쳤다. 
은하는 그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엠메? 얘 봐. 쳐 울어."

패거리 하나가 은하를 보며 비웃었다.

"야, 우리가 뭐 했냐? 왜 즙 짜냐?"

"그래, 누가 보면 우리가 존나 개새낀줄 알겠다? 어?"

패거리에게 둘러싸인 은하는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은하에게 간신히 찾아온 가족과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 기회였다. 
그런 모습을 보육원 동기들은 용납할 수 없었고, 결국 진현을 걸고넘어져 그녀를 협박하기에 이른 것이다.
간신히 숨을 고른 은하가 항변했다.

"...이제 그만 해도 되잖아. 내가 그렇게 미웠어?"

"니가 뭔데 너만 빽 있고, 너만 행복하고. 우린 뭐 개 좆인가? 앰생이면 다 같이 앰생이어야지. 뭔데 니는?"

"그래. 하여간 인생 존나 불공평해요. 느그 남친도 좀 좆돼 봐야 아~ 이년이 있어서 내가 이렇게 씹창이 나는구나~ 하겠지?"

"거 생긴 거도 한방 컷 나게 생겼는데. 개 좁밥 아님?"

"리얼루다가."

좋을 대로 떠드는 패거리들의 목소리가 귀에 담기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에 자책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런 은하를 보며 룸메이트가 같이 어깨를 들썩이며 잔뜩 비꼬았다.

"이열~ 김은하 어깨춤 쌉 장인~."

"야, 일단 데려가. 여기서 이러지 말고."

패거리 중 덩치 큰 남자 하나가 우악스럽게 은하의 팔목을 쥐고 힘껏 당겼다. 은하는 휘청거리며 남자의 품으로 끌려갔다.
은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너네 어디 가냐."

순간 건물 안에서 그녀에게 절실하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냐고."

낮게 으르렁대는듯한 목소리가 건물 복도에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건물 현관을 지나쳐 나오며 패거리를 조용히 노려봤다.

"아, 씨발. 여서 지랄하니까 껄렸잖아. 먼저 가 있어."

은하를 잡아챘던 덩치 큰 남자가 호기롭게 그에게 다가갔다. 주머니에서 발리송 하나를 꺼내며 흔들며 거들먹거렸다.

"으의. 아저시. 남 일에 꼰대 짓 하지 마시고 거 딴 데 좀 새있..."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묵직한 주먹이 남자의 복부에 꽂혔다.
남자는 어리둥절하며 배를 움켜잡더니 숨이 넘어가는 듯 신음을 내며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그의 미간으로 무릎이 날아와 박혔다.
머리가 한차례 휘청인 남자는 정신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넌 뭐, 이렇게 먼저 깝싸면 먼저 쳐 맞는거 모르냐? 
요새 자릿세 걷는 양반들도 이런 건 안 해요. 니네 뭐하는 새끼들인데?"

쓰러진 남자를 발등으로 걷어낸 진현이 씁쓸하게 뱉었다.

"뭐하는 새끼들인데 내가 이 나이 쳐먹고 니들한테 쎈 척 해야겠냐고."

덩치 큰 남자가 쓰러지자 패거리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진현은 다시 한 번 다그쳤다.

"대답 안 하지. 뭐하는 새끼들이냐고."

"아이, 씨발. 진짜."

패거리 중 한 명이 나와 진현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예. 얘가 좀 깝쳤네요. 죄송합니다."

슬며시 쓰러진 남자를 부축하며 어깨에 들쳐 메려던 그를 바라보던 진현이 말했다.

"죄송해?"

"예, 예. 죄삼다. 예."

거들먹거리는 듯 진현을 지나쳐 패거리를 지나가는 남자가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진현이 그의 발목을 걷어찬 것이다.

"어? 어, 뭔데 씨..."

고꾸라지는 남자의 등을 힘껏 걷어차 패거리 쪽으로 밀어냈다. 
은하의 팔목을 움켜잡은 룸메이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야, 씨발. 사람 팬다! 신고해! 빨리!"

그녀의 말에 진현은 힐끗 근처의 전봇대와 현관을 바라봤다.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니들 좆대로 해라. 근데, 그전에."

진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시선은 은하의 눈물 젖은 눈가를 향하고 있었다.

"내 동생 울린 씹새끼 누구야."

작가의말

몸이 아파서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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