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너만 없으면!
낙서는 모바일 기준으로 모바일과 피시의 위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제와 무관한 댓글이나 스포일러, 악플은 경고조치 없이 삭제됩니다.

2020-06-07
"이거 돌려받으려고 왔나 봐?"

근무용 탁상에 앉아 싱글벙글하며 차 키를 손가락으로 돌리는 삼촌이 말했다.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한 진현은 삼촌의 눈을 바라보기 힘겨웠다.

"아뇨, 그거 받으려고 한 건 아니고."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보험도 다 들어놨는데."

진현은 순간 혹하는 생각에 살짝 고개를 들어 차 키를 쳐다봤다. 자그락 자그락 하며 소리 내는 리모컨의 금속 부분이 살짝 빛나고 있었다.

"그... 일을 좀 하려구요."

"일?"

시치미를 떼는 삼촌에게 다시 대답하기 버거웠지만 진현은 침을 한번 삼키고는 입을 떼었다.

"여기서 일 시켜주신다면서요. 안되면... 말구요."

삼촌이 밝게 웃었다. 사랑하는 조카의 재활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진현은 삼촌이 자신을 아껴준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요즘의 삼촌은 볼 때마다 겁이 날 지경이었다.

"아. 그래. 그 말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대신."

말을 잠깐 멈춘 삼촌은 진현이 대답할 차례라는 듯 눈웃음을 치며 진현을 바라봤다.

"...은하 데리고 살면 되죠?"

"그래. 잘 아네."

"대체 걔가 뭐길래 이렇게나 신경 써주시는 거에요? 저야, 그래요. 엄마 위자료로 삼촌이 대학 가서. 그래서 챙겨주시는 거라고 쳐요. 근데, 걔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은 진현이 고개를 저었다.

"동정심 때문에 은하 인생에 끼어들어서 생긴 일이지. 매듭을 좀 지어야 돼. 그런 데엔 진현이. 니 도움도 필요하고."

삼촌은 진현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도와줄래?"

"...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때로는 나이 차 많은 형 동생처럼. 때로는 선배처럼 항상 유쾌하게 진현을 대하던 삼촌이 내비친 진심이었다.

"할게요. 은하 데리고 같이 지내면서. 여기서 일도 하면서. 엄마도 제가 이렇게 사는 건 바라지 않으실 거 아니에요."

삼촌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까지 바뀔 거라곤 예상 못 했는데. 뭔 일이 있었길래?"

"그냥요. 뭐. 이거저거..."

잠시 망설이던 진현은 멋쩍은 듯 말했다.

"좀. 즐거웠어요. 잠깐이긴 해도."

삼촌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양팔을 활짝 벌려 진현을 크게 안아주었다.

"그래. 그래. 그래... 잘했다.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너네는."

잔잔하게 웃는 삼촌을 따라 진현도 옅게 미소 지었다. 이번엔 어색하고 억지로 지은 미소가 아니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데려 나오자. 니 동생 기다리겠다."



보육원으로 돌아온 은하는 침을 삼켰다. 진현과의 하룻밤은 즐거웠지만, 긍정적인 감정을 품고 돌아온 곳은 날 세운 감정들이 부푼 마음을 찔러대는 곳이었다.
원장은 돌아온 은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보육원으로 돌아온 후가 문제였다. 은하가 보육원을 떠날 때까지 얼마나 배척당할지. 착잡할 뿐이었다.

원장은 이사장의 후원이 시작된 후로 은하를 향한 원생들의 시기와 질투를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 상 대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저 사이좋게, 싸우지 말고 지내라는 말뿐. 그것밖엔 할 수 없었다.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더 큰 상실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하가 안타까운 만큼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감정이 소중했다. 질풍노도의 시기인 아이들을 여럿 두고 편애가 더 큰 질투를 불러올 수 있었다.
그렇게 원장이 보이지 않는 차가운 감정에 지쳐갈 때쯤, 은하를 데리고 나가겠단 이사장의 갑작스러운 제안은 단비 같은 얘기였다.

"은하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요..."

"나쁜 기회는 아닐 겁니다. 못 미더우실지는 몰라두요. 일단은 오늘 둘이 만나게 하고... 가능하면 하루 같이 지내고. 그렇게..."

"네? 하룻밤 같이 보내요?"

원장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사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시는 바는 알겠지만, 은하가 그렇게 지내기 힘들다면 달리 방법이 있겠습니까. 하루 지내보면서 같이 살 만한 사람인지.
제 조카. 어린 애한테 손대는 놈 아닙니다. 그날 처음 보는 애한테 그럴 강심장도 아니구요."

이사장의 확고한 믿음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원장은 이사장을 믿는 만큼 그 `조카` 역시 은하를 믿고 보낼만한 사람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녹음하셔도 좋습니다. 일이 잘못되면 퍼트리셔도 되구요. 제자였던 아이 가족에게 허튼짓 안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불러올게요."

그렇게 진현과 은하의 첫날 밤이 결정되었다. 은하가 자발적으로 진현의 집에 찾아가고, 하루 지내고 오겠단 얘기도 이미 원장과 이사장에겐 예상 가능한 범위였다.
사람과 사랑이 고픈 아이였다. 마치 그녀의 어머니처럼. 즉흥적이고, 감정에 솔직한 아이. 그게 은하였다. 그리고 진현은 은하에게 그런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존재라고 판명된 것이다.
돌아온 은하의 밝은 표정에 한시름 놓았지만 은하가 여기 있는 이상 갈등을 피할 수는 없었다. 원장은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은하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은하는 흠뻑 젖은 자신의 교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얘기하지 않을 테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악의가 은하의 등 뒤를 찔렀다.

"어제 비 오더라. 소나기."

은하를 보자마자 적대감을 대놓고 드러낸 룸메이트가 비꼬며 말했다. 은하는 대꾸하지 않았다.

"맞어. 어떻게 니 옷에만 내리던데. 빨아 달라지? 니네 이사장한테 부탁해봐."

"그래. 돈도 많은데 하나 사 달라든가. 어제 밤에 둘이 모텔 가서 교복플이라도 했을거 아냐?"

다가온 원생 한 명이 동조하며 비웃었다. 은하는 `너네가 입고 학교 가는 교복도 이사장님이 사주신 거야.`라는 목소리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참았겠지만 진현을 만난 뒤로 마음속에 자신감이 생겼다. 은하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어젠 남친이랑 지냈는데? 이사장님 조카."

그들 앞에선 오빠란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나잇대가 으레 그렇듯 이성에 관심이 많을 때인 만큼 은하는 좀 더 효과적인 거짓말을 뱉었다.
은하의 입에서 나온 `남친` 소리에 동조하던 원생이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남친?"

"그래. 너넨 없는 남. 친. 키 크고 잘생기고. 몸 좋고."

은하는 속으로 진현을 떠올렸다. 모나진 않았지만 그리 빼어나지도 않은 생김새였다.
양심에 찔리는듯한 표정을 가까스로 숨기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상하고."

최소한 이것만큼은 사실이라 여겼다.

"너네 나 꼴 보기 싫은 거 알아. 나 나가면 만날 일도 없을 거 아냐? 난 이제 남친이랑 같이 살 거거든, 어제처럼."

기세등등한 은하를 노려보던 룸메이트가 말했다.

"잘도 낚았네. 이사장 스폰 받는 얼굴이 뭐 그렇지."

막말을 뱉는 룸메이트에게 기세가 꺾이지 않은 은하가 맞받아쳤다.

"억울하면 이렇게 태어나던지."

"개 같은 년."

표정이 일그러진 원생이 뱉었다.

"니 엄마처럼 될게 훤하다. 그 남친도 도망가겠네."

한때 가정사를 주고받던 룸메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은하는 순간 울컥했지만,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대꾸했다.

"니넨 도망갈 남친도 없으면서."

압도되지 않는 은하를 보며 둘은 맥이 풀렸다. 이미 잔뜩 추하게 시비를 걸어왔지만, 더 이상은 소용이 없다 느꼈다.

"얘기할 거 더 없지? 마침 온 김에 내꺼좀 나눠줄게. 난 새로 살 거거든."

"개소리 하지 말고. 니껄 누가 써."

원생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왜~ 너넨 사줄 사람도 없잖아."

"아. 개 깝치네 진짜."

룸메이트가 성질을 내며 손을 올렸지만 은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조용하지만 힘주어 노려본 은하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조용히 있다 가라. 존나 꼴 뵈기 싫으니까."

뒤돌아서며 룸메이트가 신경질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은하 역시 가소롭다는 듯 답했다.

"건들지나 말고."

둘은 뭐라 더 얘기하려다 포기하고 은하를 내버려둔 채 방을 나섰다.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던 은하는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가 무섭게 다리가 풀려 이내 털썩 주저앉았다.



진현과 삼촌이 보육원에 도착한 건 점심 무렵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곤 했지만 그 짧은 사이 남매가 새로 살 방 한 채를 구하고, 진현의 새 일자리를 준비해 놓았다. 삼촌의 행동력은 무서울 수준이었다.
원장실에 들어선 진현은 입구부터 흐르는 불편하고 어색한 기류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저 익숙치 않아서겠거니 싶었다.

"오빠아아아아!!"

저 멀리서 소리치며 은하가 달려왔다. 진현은 `뭐야. 얘 왜 이래.` 생각하며 자신의 품에 안기는 은하를 보며 어찌할 줄 몰랐다.

"보고 싶었어어."

일부러 남들 보라는 듯 진현에게 몸을 비비는 은하의 뒤로 시선이 느껴졌다. 결코 호의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진현은 잠자코 은하에게 맞춰 주었다.
삼촌은 그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은하가."

당혹스러운 건 원장도 마찬가지였다.

"오빠랑 많이 친해졌나 봐요."

진현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 응... 네? 네."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구요. 되게 재밌게 해줬어요."

밝게 웃는 은하를 보며 진현은 뭐라 말을 맞춰야 할지 고민했다. 결국 생각하는걸 그만둔 채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짐 싸는거 도와줄게."

진현은 가져온 캐리어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고마워!"

밝게 웃는 은하가 진현의 손을 붙잡고 원장실을 나섰다. 은하의 방으로 손을 잡고 올라가는 남매를 곁눈질하는 시선이 많았다.
진현은 올 때부터 느껴지던 불편함의 원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은하의 방 한 쪽에 자리한 공용 옷장엔 교복과 옷 몇 벌. 그마저도 대부분 입기 편한 츄리닝과 파자마. 사복이랄 것도 딱히 없었다.

"이게 다야?"

"응, 오빠!"

지나치게 밝아 보이려는 부자연스러운 모습. 진현은 주위를 살피며 소곤거렸다.

"...이거... 연기하는 중이냐?"

"응!"

큰 소리로 대답하는 은하와 그 뒤로 남매를 지켜보는 룸메이트가 시선에 들어왔다.

"그래."

진현은 납득한 듯 끄덕였다. 일단은 어울려주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해도 맞장구쳐 주겠다고 다짐했다.

"오빠 어제 너무 아팠어."

"뭔 미친 소리야."

"담배 쩐내 때문에 머리가 아팠단 건데?"

"아. 좀. 야, 야."

다짐이 무색하게 훅 들어왔다. 진현은 어찌할 줄 모르며 쩔쩔맸다. 그 모습을 보던 은하는 짓궂게 웃었다.

"가자!"

은하는 보란 듯이 진현의 팔짱을 낀 채 원장실로 향했다. 진현은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애써 무시한 채 은하를 따라 짐을 들고 따라갔다.

원장실에 들어서자 마침 삼촌은 문서 한 장에 사인하고 있었다.

"아. 그래. 왔구나. 은하는 여기다 싸인 하면 된다."

은하가 주저 없이 펜과 문서를 들자 진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뭐하는 종이인지 물어보지도 않네.`

잠시 머뭇거리던 은하는 곧바로 문서 하단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놓았다. 머뭇거리던 건 문서를 읽어본 게 아니고 사인을 생각한 것이다.
은하가 이름을 적는 모습을 보며 원장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됐...어요... 원장 선생님?"

눈물이 고인 원장을 눈치 챈 은하가 놀라 물었다.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감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우리 은하... 잘 부탁드려요... 정말로요..."

원장은 손을 한데 모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삼촌 역시 정중히 인사하며 원장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걱정해주시는 만큼 잘 지낼 겁니다."

진현 역시 눈치를 보다 고개를 숙였다. 바닥엔 어느새 원장의 눈물이 몇 방울 떨어져 있었다.

원장은 끝내 아쉬운 듯 보육원 바깥으로 마중을 나갔다. 진현의 손을 꽉 잡은 은하의 얼굴은 시설에서 지낼 때는 찾아볼 수 없던 행복함이 가득했다.
이곳에선 끝내 서로 마음을 연 가족이 될 수 없었지만, 새로 생긴 가족이 행복을 가져다주길 바랐다. 원장은 차에 탄 은하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행복하게 지내야 해... 엄마가... 많이 사랑해..."



진현은 하루 만에 되돌려 받은 차를 몰고 새로운 남매의 집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은 은하는 진현의 오른손을 붙잡고 있었다. 기어를 변경할 때를 빼면 거의 포개고 있는 수준이었다.

"사고 날라."

짐짓 염려하는 삼촌이 웃으며 말했다. 진현도 거들었다.

"그래, 이제 연기 그만해도 되잖아."

"뭔 연기?"

삼촌이 궁금한 듯 묻자 진현은 얼버무렸다.

"있어요, 그런게. 얘 막 아까 밝은 척 엄청 해댔던데. 연기 학원 생각하냐?"

진현의 말을 들은 은하는 손을 빼며 살짝 토라졌다.

"아니, 진지하게. 팔짱 끼고. 손잡고. 누가 보면 애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을걸요?"

"친해져서 그런 거겠지."

피식 웃는 삼촌과 맞장구치는 진현을 뒤로하고 은하는 창문을 보며 속삭였다.

"...그건 연기 아닌데."

작가의말

별점

회당별점 0점
별점주기

댓글

최신순 등록순 추천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