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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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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6
"자고 간다고? 했다고?"

빤히 바라보는 은하를 두고 진현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네. 왜요?"

"내가 뭐라고 말할지 알지?"

"전 바닥에서 자라구요?"

피식 웃은 진현은 혀에서 맴도는 말 중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기에 시간이 걸렸다.

"왜 여기서 자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근데?"

"그럼. 저 어디서 자요? 밖에서?"

"아니, 돌아가면 되잖아. 왜 그런 얘길 한 거야? 날 뭐로 보겠어? 널 뭐로 보겠냐고."

은하가 배시시 웃었다.

"오빠랑 동생으로 보죠?"

"아니. 아."

"이미 얘기했어요. 그리고... 돌아가기 싫어요."

진현은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 진짜 따돌림당해서?"

"네."

살짝 궁금하기도 했지만 아직은 물어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얘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애들이... 그렇게 심하게 굴어?"

"이사장님께서."

은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절 돌봐주신다고 하셨을 때 부터요. 알게 모르게 그렇게 됐어요. 물론... 이사장님께선 보육원 전체에, 많이. 많이 보내주셨죠. 그래도..."

"원장님은, 거 원장 선생님은 모르시고?"

"안다 하셔도 어쩔 수 있나요. 저만 챙겨주실 수도 없는데."

진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얘길 꺼낸 기분이었다.

"일단 뭐좀 시키자. 배고프다."

진현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발코니로 향했다. 살짝 돌아서 은하를 바라본 그는 곧바로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아니, 삼촌!"

그제야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삼촌은 살짝 미소 지었다. 헤어지기 전의 상태보단 많이 풀린듯한 목소리였다.

"아. 그래. 은하 만났지?"

"얘 왜 여기서 자고 간대요?"

"뭐 어때. 가족이 같은 집에서 자는 게 안돼?"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삼촌의 말에 기가 찬 진현은 항변했다.

"아니, 뭔 일이 있을 줄 알고!"

"너. 동생한테 뭔 일 하는 애였니?"

"아. 좀. 삼촌."

"너한테도, 은하한테도 좋은 일일 거다. 은하가 큰 맘 먹고 온 거니까. 얘기도 많이 하고. 잘 재우고 보내라."

"좋기는. 삼촌! 삼..."

진현은 이미 통화가 끝난 핸드폰에 소리를 질렀다. 커질 대로 커진 목소리를 들은 은하가 진현을 멀뚱히 바라봤다. 슬쩍 눈치를 보다가 이내 얼버무렸다.

"그니까. 그. 치킨집이 전화를 안 받네."

쿡쿡 웃은 은하는 모른 척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다른데 걸어봐요."

"그, 그...래."



치킨의 마지막 조각을 뜯어 먹은 진현은 손을 닦고 슬쩍 핸드폰을 켰다. 말로는 허세를 부렸지만 잔고는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슬쩍 은하가 계산하게 둬도 괜찮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숫자였다. 확실히, 이런 생활이 지속될 수는 없었다.

"아직 안 늦었으니까, 가라고 하시려구요?"

진현이 시간을 확인한다고 착각한 은하가 먼저 말을 꺼냈다. 표정은 밝았지만 내심 불안한듯했다.

"그래... 아니. 그건 아니고."

"아니에요? 그럼 자고 가도 되는 거죠?"

"아..."

뭔가 말려버렸단 기분이 들었다. 진현은 체념한 듯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라."

눈웃음을 치는 은하를 보며 진현은 `정말 한 군데도 닮은 데가 없네.` 라 생각했다.

"근데 너 갈아입을 옷이나, 그런 거. 갖고 왔냐?"

"아뇨?"

"어?"

당당히 말하는 은하를 보며 오히려 진현이 할 말을 잃었다.

"오빠꺼 입고 자면 되죠."

"아니 미ㅊ."

당황해 말문이 막힌 진현을 바라보는 은하의 얼굴은 마냥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저, 막 큰 치수. 헐렁헐렁한 거 입고 자보고 싶었는데."

힐끗 은하를 바라본 진현은 고개를 저었다. 발육상태를 보아하니 진현의 옷도 그다지 헐렁헐렁하지 않을 것이다.

"하...씨. 모르겠다. 일단 꺼내놓을 테니까 먼저 씻... 씻어."

진현은 씻으란 소리가 스스로 어색하게 들렸다. 마음의 동요가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근데, 옷 어디다 둬요?"

"거 아무데나... 아."

원룸에서 씻으려면 그 방에서 벗어야 한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홀로 살 때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다.

"아, 잠만. 기다려봐."

진현은 구석의 옷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옷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 안 보고 있어! 가 씻어!"

은하의 웃음소리가 뒤편에서 들렸다. 잠시 후 바닥에 옷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에 진현은 눈과 귀를 꽉 막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은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오빠!"

"어! 어어...어!"

화들짝 놀라며 진현이 대답했다.

"배수구에서 이상한 냄새 나요!"

"아."

맥이 풀려 나지막이 웃은 진현이 답했다.

"거. 토했어. 오늘 새벽에."

"왜 토를 여기다 해요?"

이해할 수 없다는 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진현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여요오오. 날 괴롭히고 있어어."

말을 늘리며 능청을 떠는 은하를 보며 진현은 문득 궁금해졌다. 아까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우물쭈물하더니 지금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너 근데 원래 이런 성격이야?"

"뭐가요? 잘 안 들려요!"

물이 요란스럽게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은하의 목소리가 화장실에서 가득 울렸다.

"샴푸! 다 떨어져서 비누로 씻어야 된다고!"

"으!"

질린듯한 은하의 대답을 들으며 진현은 옷장에서 옷을 신중하게 고르기 시작했다. 코를 킁킁대며 최대한 담배 냄새가 나지 않는 옷으로.
딱히 뭐가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라는 생각에 한 벌을 쥐어 들었다.

"나 나가 있을게! 다 씻으면 수건이랑 놔둔 거 입어!"

화장실을 지나치며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진현이 황급히 문을 열고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주머니를 뒤적이던 그는 탄식했다.
담뱃갑을 침대 밑에 던져버렸단 걸 뒤늦게 기억해 낸 것이다. 진현은 30분 정도를 서성이며 자취방 건물 근처를 돌아다녔다.



덥고 습기 찬 한여름의 저녁은 돌아만 다녀도 금새 꿉꿉해지기 마련이었다. 방 안이라고 다를 건 없었지만 선풍기는 있었으니까.
은하는 헐렁한 티셔츠와 츄리닝을 입고 선풍기 바람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밖에 덥네."

"오빠. 이거 껴요. 더 큰 거 없어요?"

진현은 못들은 체 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입장하며 풍겨올 악취에 짐짓 미간을 찌푸렸으나 생각보다 냄새는 나지 않았다.

"뭐야. 별 냄새 안 나는데."

"제가 다 치웠거든요."

진현은 배수구를 흘낏 봤다. 긴 머리카락 몇 올 이외엔 `파편` 하나 보이지 않았다.

"뭐하러."

"그거 두고 어떻게 씻어요? 머리 막힌 거 빼는 김에 좀 청소했어요."

"하이고."

살짝 허탈하게 웃은 진현은 문을 닫고 걸쇠를 걸었다.

"안 볼 건데 왜 잠가요?"

"안 볼 거면 왜 신경 써?"

제법 주고받는 게 익숙해졌다 스스로 느꼈다. 이렇게 티격태격해본 것도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의 물소리가 들린 후, 끊기고 나서 다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진현이 화장실 밖으로 옷을 입고 나온 건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은하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나온 진현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어흐. 깨운해."

"세수만 했어요?"

"아니?"

진현은 황당해 하는 은하를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봤다. 젖은 머리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머리 감고. 이빨 닦고. 몸에 비누 문대고. 다했는데."

"너무 빠른데."

"상관없잖아. 것보다 너."

화제를 돌린 진현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냐?"

"성격이 왜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니까. 너 처음에는 막 말도 되게... 뭐라고 해야 하냐. 망설이고. 무튼."

"낯을 좀 가려요. 그래도 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나오는 게, 이게 원래 제 성격이에요."

"친... 우리 오늘 처음 본 거 알지?"

"네. 우리 오빠."

진현은 또박또박 강조해서 말하는 은하에게 질렸다는 얼굴을 내비쳤다.

"...됐다. 이불 펼 테니까 넌 위에서 자라."

"저 아직 머리 덜 말랐는데요? 그리고 벌써 자요?"

더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멋대로 뱉은 말이긴 했다. 진현은 슬쩍 핸드폰을 켜고 시간을 확인했다. 8시를 막 넘긴 때였다.
평소라면 집에서 멍하니 누워 스스로 자책하기 시작할 때였다. 늘 똑같은 레퍼토리로 시작해 괴로워하다 지쳐 눈을 감는 일상의 반복. 오늘만은 그런 기분이 딱히 들지 않았다.

"몰라, 일단 난 좀 누워있을 거야."

"얘기 좀 더 해요."

진현은 눈을 빛내며 조르는 은하를 신기하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뭔 얘길 더 해. 폰이나 봐."

"폰만 보려고 여기 온 거 아니거든요? 이번엔 오빠 얘기 좀 해주세요."

"...그건 나중에."

"왜요?"

은하는 일순간 슬픈 빛을 띤 진현의 얼굴을 놓치지 않았다. 짐작일 뿐이지만 언젠간 얘기해 주겠지 생각하며 마음을 접었다.

"알겠어요, 뭐."

"것보다 왜 굳이 오늘 처음 봤는데. 그냥 얼굴만 보고 익혔어도 될걸. 하루 자고 가겠다고까지 한 거냐."

"기정사실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지요."

은하는 짓궂게 웃었다. `기정사실?` 진현은 뭔가 쎄한 기분이 들었다.

"미리 말하는데 날 뭐 이용해 먹으려고 들..."

"려는거 아니구요. 그냥 나한테 가족 생겼다고 과시하고 싶었어요. 괴롭히는 애들한테."

진현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수긍할만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면 뭐."

"이해해주실 수 있죠?"

"알겠다."

오늘 하루 참으로 그에겐 많은 일이 찾아왔다. 단조롭다 못해 지루하고 씁쓸한 일상과는 다른 하루.
정신적인 피로가 잔뜩 쌓였다. 진현은 몰려오는 졸음에 저항하며 한 마디 뱉었다.

"거, 머리 계속 말릴 거면 내가 위에서 잘게."

"그러세요."

덜덜대며 돌아가는 선풍기를 뒤로하고 진현은 눈을 감았다. 이 방에 다른 이의 체취가 느껴진 건 처음이라는 생각을 지닌 채.
비누 냄새가 생각보단 향긋했구나. 그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진현이 자고 일어나니 은하는 자기 전 봤던 그 모습 그대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순간 잠깐 잠들고 다시 깬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끔벅이며 머리를 굴려본 진현은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이른 아침이었다.

"아직도 말려? 설마 몇 시간을..."

진지하게 묻는 진현의 말에 웃음보가 터진 은하가 대답했다.

"담배 냄새 때문에 머리 아파서 일찍 깼어요. 씻고 말리는 거에요."

"그...랬냐."

"그랬네요."

눈썹을 긁적이던 진현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하나도 피로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 밤에 자면서 무슨 짓 안 했어?"

"뭔 짓이요?"

으레 꾸던 악몽으로 괴로워하던 모습을 본 게 아닐까 싶었다. 진현은 살짝 긴장했다. 은하가 웃으며 말했다.

"뭐, 그렇고 그런 짓이요?"

"그렇고 그런 짓이 뭔데."

"남녀가 하는 거."

"미쳤냐고."

머리를 말리다 말고 은하는 또다시 웃음보가 터졌다.

"없었어요, 오빠. 잘만 주무시던데."

"아무튼."

진현은 헛기침을 하며 은하를 옆 눈길로 바라봤다.

"내가 착해서 망정이지, 다른 데선 이번처럼 그러지 마. 막 함부로 남의 집 가서 자고 그러지 말라고."

"다른 데서 그럴 일 없어요. 남의 집도 아니잖아요."

"말을 말자."

진현은 부쩍 은하와의 거리가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어제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녀 역시 진현을 대하는 데 있어서 편안한 분위기였다.

"밥은. 맞다. 너 양치 같은 건 어떻게 했어."

"오빠 칫솔 안 뜯은 거 썼어요. 어제도 물기 안 묻어 있길래 쓸까 하다 다행히 한 개 있더라구요. 여행용. 근데 그런 거 이제 물어보시는 거 보면 평소에..."

"아 뭐. 왜. 어젠. 하루 걸렀어. 그래."

"아닌데, 칫솔 새거던데."

"나가!"

성질을 내는 척 하는 진현과 짓궂게 놀려대는 은하는 이미 어제의 거리감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진현은 삼촌이 말해온 좋은 일이란 이런걸까 싶었다.
기분 나쁘지 않은 아침을 맞는 게 얼마 만인지. 이 익숙지 않은 즐거움을 잠깐이나마 즐기고 싶었다.
은하는 단장을 마치고 진현에게 꾸벅 인사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머쓱해 하던 진현은 수줍게 말했다.

"...또 보자."

"네, 오빠!"

건물 밖까지 배웅하려던 진현을 한사코 말린 은하는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다. 진현은 은하가 떠난 현관문을 한참 쳐다봤다.
힘이 돋는 아침이었다. 뭔가가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는 방안을 둘러보며 오래 쌓여 쉰 냄새가 나는 빨랫더미와 발코니의 재떨이를 차례로 쳐다봤다.
비로소 치울 맘이 생긴 것이다. 분명 긍정적인 변화였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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