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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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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4
"폰 좀 줄래?"

선배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번호 찍어주게. 요번에 훈련 갔다가 깨져서 바꿨어."

"아, 예."

진현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은 선배는 화면을 쿡쿡 찍으며 말했다.

"힘들면 푸념이라도 좋으니까 톡 해. 너 전역하고 연락 한번 안 한 심정은 알겠는데."

선배의 말대로 진현은 전역하면서 군 생활 중 알게 된 모든 이들의 연락처를 지웠었다. 
그에게 과거는 무거웠고, 현재는 복잡했으며 미래는 두려웠다. 인간관계를 하나씩 끊어내고 싶었다.
자신의 번호도 지워졌음을 선배가 모를 리는 없었다. 그저 진현에게 변명거리를 주려 했을 뿐이다. 핸드폰을 돌려주며 선배는 말을 이었다.

"성주는 누가 와도 못 구했어. 거기 있던 나도, 너도. 그건 우리가 제일 잘 알잖아."

"...제가."

"니가 뭐."

선배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니가 뭐. 좀 더 신중했으면? 하..."

선배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고는 꽁초를 재떨이에 튕겨내며 말했다.

"괴롭겠지. 그래. 니네 둘이 진짜 친했잖냐. 근데, 덕분에 넌 살았어! 산 사람은 살아야지!"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얼마나 편리하고 비겁한 말인가. 진현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니가 거기서 얼마나 더 신중했어도 바뀔 건 없었다. 고작 너 하나, 나 하나가 누굴 죽이고 살릴 위치가 아녔는데."

선배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득 담아 진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전역했으면. 잊고 살아. 그러려고 나온 거 아니냐. 응?"

진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틀린 말은 없었다. 그렇다고 긍정할 수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자신을 비난하며 썩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제 일처럼 속상해하는 선배의 따듯한 마음만은 알 수 있었다. 그에겐 늘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 붙잡지 않아 멀어진 사람들도 있었다. 선배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새 출발 할 거라면. 지금이 기회야. 잊어. 물론... 성주한텐 미안한 얘기지. 그래, 그냥 내 번호도. 지워 그냥. 그때 기억 다 잊고 니 인생을 살아."

선배는 분개하며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올만에 보면서 이런 얘기 해서 미안하다."

"오죽 답답하셨으면 그러셨겠습니까."

선배는 숨을 들이켜 뭐라 내뱉으려 했지만 이내 내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아는 놈이."

선배의 진심 어린 충고였지만 진현의 마음은 바뀌지 못했다.
그는 앞으로도 밤마다 악몽을 꾸고, 주변인들에겐 꾸며낸 밝은 모습을 보이며 집에선 홀로 괴로워할 것이다. 그 모든것이 속죄라고 생각하면서.
진현은 그나마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선배님. 만나 봬서 반가웠습니다."

"...갈거냐."

선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은 더 있었지만 할 수 없었고, 하면 안 됐다고 느꼈다. 아끼던 후배였던 진현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선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삼촌은 차를 몰아 진현의 자취방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빌라가 빽빽하게 들어선 거리는 좁았다.
몇 번을 돌아 건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간신히 주차 장소를 찾은 삼촌은 터무니없이 비싼 주차비용을 보곤 혀를 내둘렀다.

"여긴 차 끌기도 힘든 데구만. 진현이가 안 받은 거도 이해는 간다, 그치?"

에둘러 진현을 변호하는 삼촌의 어색한 웃음에 은하 역시 동조하듯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그놈이 심성은 정말 착한 애야. 아마 시간을 좀 두고 그랬으면 함께 지낼 수 있었을 거다."

은하는 끄덕였다. 삼촌이 문득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은하는 생각보다 별 거부감이 없더랬구나. 암만 그래도. 편안한 사람이었어도 처음 보는 사람이랑 같이 지내는데 승낙한 이유가 뭐였니?"

"이사장님을 믿으니까요.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랑 같이 살아야 하면, 그래도 가족인 사람이랑..."

"그래, 아저씬 가르친 제자 딸한테 수작 같은 건 안 부린다. 그래도..."

"함부로 믿으면 안된다는 거죠?"

삼촌은 은하가 기특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래. 아, 여기다. 다 왔네."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샌가 진현의 자취방 건물 앞에 도달했다. 둘은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찐득거리는 계단 바닥과 여기저기 얼룩진 벽면이 관리인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된 곳임을 알려줬다.

"좀... 저렴한 곳에서 사는가 보구나. 우리 진현이."

애써 포장해서 말하는 삼촌은 수심 깊은 표정이었다. 
은하 역시 계단을 오르면서 이따금 풍기는 시큼한 악취에 흠칫거렸다.

"삼백..사 호. 여기네."

"근데."

은하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가 더 빨리 온 거 아닌가요?"

"아."

삼촌이 짧게 탄식했다.

"아이고. 그놈 걸어올라나? 이거... 시간 되려나 모르겠는데."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삼촌이 혀를 찼다. 평소답지 않게 허둥댄 모습이었다. 약간 어색한 표정과 함께 은하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은 여까지 하고, 데려다줘야겠구나. 원장님께서 기다리시겠다."

"바쁘시면 먼저 가셔도 괜찮아요. 그분 기다리고 있을게요."

"...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겠어? 그냥 나중에 또..."

"...기회는..."

은하는 원장이 한 얘기를 떠올렸다.

"기회는 있을 때 잡아야 한다셨어요. 오늘 아니면 왠지 안될 것 같아요."

"하이고."

삼촌은 은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또 언제 이런 일이 있을지 모르지. 우리 조카 좀 잘 설득해 줘라, 은하야."

"네, 이사장님."

똑 부러진 대답을 들은 삼촌은 만족한 표정으로 지갑을 꺼내어 5만 원 지폐 한 장을 건넸다.

"혹시 모르니 차비 해라."

"아, 아니 괜..."

"괜찮아. 남으면 용돈이라도 해."

지폐를 건네받은 은하는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삼촌은 흐뭇해 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건물을 나선 삼촌은 차에 탄 후 잠시 자취방 건물을 살피더니 원장에게 전화했다.

"예. 잘 된 거 같습니다, 원장님."

"괜찮은가요? 은하랑 둘이 둬도."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무슨 일은 없겠죠?"

원장의 걱정이 가득 묻어 나오는 염려에 삼촌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제 조카, 착한 앱니다. 믿으셔도 돼요. 좋은 오빠가 될 거에요."

"그렇게나 말씀하신다면... 일단은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삼촌은 한층 풀린 표정으로 차를 몰아 돌아갔다. 계획이 잘 돼 가고 있다 여기며,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길 바라며. 진현의 일상이 슬픔을 걷어 내길 염원했다.



진현이 돌아온 것은 30분쯤이 지난 후였다. 더운 공기를 들이쉬며 건물 현관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그를 맞이했다.
잠깐 짜증을 낸 진현은 투덜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오르는 와중에도 덥고 습한 공기는 그를 괴롭혔다.
오늘은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낮에 있던 일은 그저 자고 나면 잊힐 인연일 뿐이기를. 그리고 조만간 삼촌과의 연락도 끊고 어디론가 가버릴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집에 들어서서 바로 샤워할 생각 가득하였던 진현은 자신의 자취방 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는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어?"

벽을 기대고 서 있던 은하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진현을 바라봤다.

"너 왜 여깄어."

"얘기를 좀... 하고 싶어요."

"무슨 얘기. 뭐. 거. 같이 살자는 거?"

진현이 지긋지긋한 듯 고개를 저었다.

"미안한데.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아. 그리고 이렇게 찾아오는 거 실례인 거 알지?"

"그건... 죄송해요."

"됐어. 가면 돼."

매몰찬 진현의 반응에 은하는 잠깐 위축되었다. 그러나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저, 갈 데가 없어요."

"...뭐?"

"앞으로... 같이 살고 싶어요..."

"무슨 소리야 얜 또. 너 사는 그 고ㅇ... 보육원은 어쩌고?"

은하는 우물쭈물했다. 진현은 이마를 짚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들어와 봐. 여서 얘기 말고."

진현은 마지못해 자취방의 현관문을 열었다. 담배 찌든 냄새와 함께 비릿한 냄새가 은하의 얼굴을 덮쳤다.



냉장고엔 오래전에 공용 주방에서 받아 놓은 물 한 통과 소주 두 병 뿐이었다. 컵이랄 것도 없었다. 진현은 화장실에서 양치용 컵을 가져오려다 포기하고 말했다.

"컵 없는데, 그냥 입 대고 먹어도 돼."

"아, 아뇨. 괜찮아요."

진현이 자포자기한 듯 웃으며 말했다.

"보다시피 이래. 엉망이야. 생활력도 없고. 아까 너랑 삼촌한테 한거 봤지? 나 성격 이상해. 아까는 다 가식이었어."

"...아픔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 근데 극복 못 하고 이렇게 살아. 앞으로도 그럴 거 같고. 난 누구랑 같이 살 상황이 안돼."

"같이... 지내면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조심스럽게 말하는 은하를 보며 진현이 비웃었다.

"너랑? 무슨 재주로 날... 아니, 것보다 넌 대체 왜 이런 나랑 지내겠다는 거야? 갈 데가 왜 없어? 여태 지내 던 덴 뭐고?"

"그게..."

"뭐 학대당하고 그래? 따돌림?"

은하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뇨! 원장님은 좋은 분이세요. 정말요!"

"그럼 애들이랑 문제 있는 거네."

말문이 막힌 은하를 보며 진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럴 수도 있었다. 집이라 불릴 곳의 가족 같은 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면 아무리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 테니.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왜 그런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진현은 은하를 아직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함께 지내면 귀찮은 일만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이렇게 괴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게 더 마음에 편했다.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으니까.
진현은 한참을 곱씹다 입을 열었다.

"...난 사람을 죽였어."

진현은 흠칫 놀라는 은하를 바라봤다. 무턱대고 거부하면 은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돌려보낼 실마리가 생긴듯했다.

"정확히는. 나 때문에 죽었지. 친동생처럼 가까운 사람이었어. 나 때문에 한 사람의 인생이 거기서 끝난 거라고."

갑자기 구역질이 났다. 진현은 입술 안쪽을 속으로 씹으며 말을 이으려 노력했다.

"우리... 엄마도. 나랑 같이 살았기 때문에 결국 돌아가셨어. 나만 없었으면 좀 더 나은 삶을 사셨을 거야. 내가... 내가."

괴로운 기억은 숨마저 가쁘게 만들었다. 감정이 벅차오르던 진현은 잠시 숨을 골랐다.

"내가. 나랑 함께하는 사람들을 다 죽게 한 거라고."

경멸해 하길 바랐다. 그 차가운 눈초리로 쏘아보면서. 진현은 눈을 감고 은하의 반응을 기다렸다.

"...저도 사람을 죽였어요."

돌아온 대답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진현은 눈을 치켜뜨고 은하를 노려봤다.

"장난하자는 거 아닌데."

"저도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오빠 말대로. 우리 엄마는 힘들게 절 키우다 돌아가셨어요. 제가 반찬 투정을 해서. 장을 보러 가셨다가요."

은하의 가는 체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진현을 힘주어 쳐다봤다.

"저만 없으면 엄마는 새로운 분을 만날 수 있었어요. 이젠 알아요. 옛날에 엄마가 아빠 보고 싶지 않냐고 했어요. 이젠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근데."

은하 역시 갑작스럽게 말문이 막혔다. 잠시 주저하던 은하의 눈에 이내 눈물이 맺혔다.

"그치만요. 저도 정말 제가 밉고 원망스럽고.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엄마가 자기 행복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켜온 게 저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급기야 훌쩍이는 은하를 보며 쩔쩔매던 진현은 근처에 널브러진 수건을 집어 건네려 했다.
집은 순간 수건에 붙은 머리카락과 먼지를 발견한 진현은 빨랫더미를 향해 수건을 멀리 던져버렸다.

"그러니까요. 오빠도 그런 얘기 하지 마세요... 같은 아픔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분들은 오빠가 이렇게 사는걸 바라는 게 아니실 거라고요..."

죽은 이들은 남겨진 이가 자신을 잊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겠지만 살아있는 이들은 결코 그들을 잊을 수 없었다. 슬픔은 평생 아물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진현은 문득 선배가 한 말이 떠올랐다. 상처가 죽을 만큼 아파도 죽지는 않는다. 정말 괴로워서 죽고만 싶었지만 죽지는 못했다.
진현은 한숨을 내쉬고 주머니 속의 담뱃갑을 움켜쥐었다. 곧이어 은하를 바라본 그는 담뱃갑을 꺼내어 침대 밑으로 던졌다.

"그래. 너랑 같이. 나랑 같이... 삼촌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이게 아닌데, 하며 속으로 생각했지만 이미 진현의 자세는 많이 풀어져 있었다. 개운하진 못했지만 당장은 얘기를 좀 더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로 대화나 좀 해보자."



진현은 그 후로 내리 몇 시간을 듣고만 있었다. 저 어린 나이에 할 말이 그렇게도 많았던가 싶었다.
은하는 살아오면서 드문드문 생각나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 어머니와 함께 지낸 나날들을 풀어냈다. 추억이기에 좋았고 기억이기에 선명한 아픔이었다.
진현은 점차 은하가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얘기들을 들으며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자각하지도 못했다.
덥고 습기 찬 여름날의 퀴퀴한 골방 안에서 두 남매는 낡은 선풍기를 앞에 두고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나갔다. 해가 뉘엿해질 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배를 고파하며 화제를 바꿨다.

"뭐 먹고 얘기할까."

"그럴까요?"

어느새 은하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못했던 이야기들은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응어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개운해 하는 은하를 보며 진현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띠었다.

"어! 웃으셨네요. 그쵸?"

"어? 아. 어. 그러네."

"기분 좋게 치킨 시켜 먹어요!"

"치킨?"

"제가 살게요!"

은하는 삼촌에게 받은 5만원권을 내보였다. 진현은 피식 웃더니 지폐를 도로 은하에게 밀어 넣었다.

"됐어. 띠동갑 동생한테 얻어먹을 만큼 궁상은 안 떤다. 너 해라."

진현은 스스로 은하를 동생이라 불렀다는데 놀라면서도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은 자신이 놀라웠다. 
어느샌가 마음을 열게 된 것인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적어도 지금 순간은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먹고, 슬슬 가라. 거 원장님 걱정하실 건데."

약간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 또한 스스로 놀랄만한 일이었지만 진현은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저 오늘 여기서 자고 간다고 했는데."

"뭐?"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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