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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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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30
태어난 후 10년간 은하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구성원은 어머니와 자신. 그리고 그 주변의 이웃들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던 나날이었다.
가족과 어머니의 의미가 완전히 동일하던 그 시절. 은하는 가족 구성원이 더 늘어나는 걸 반기지 않았다.
그녀의 울타리 안 익숙함이 사라지는 게 두려웠을 나이.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라는 존재는 생소했던 개념이었다. 어머니와 둘이서 잘 살아왔으니까.

은하의 어머니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의지할 곳 없었지만, 그녀를 낳고 쉴 틈 없이 일했다. 가끔은 외로웠고 가끔은 체력적으로도 힘에 부쳤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는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행복과 위안보단 사랑하는 딸의 감정이 더 중요했던 `어머니`였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맞이한 은하의 첫 번째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두고 접시와 포크 두 개면 꽉 차는 소반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나지막이 말했다.

"은하는 아빠 보고 싶지 않아?"

"엄마가 제일 좋아!"

딸의 천진난만한 미소. 그녀는 은하의 이 웃음을 바라보기 위해 살아온 것이라 느꼈다. 조촐하지만 감정은 모자라지 않은 둘의 행복한 저녁 식사였다.
은하를 재우고 난 뒤 어머니는 은하의 옆에서 한참을 누워있었다. 잠시 고민한 그녀는 자주 메신저를 주고받던 남자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남자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우울했지만 감정에 젖어있을 수는 없었다. 은하의 어머니는 다시금 다짐했고 은하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며 함께 잠들었다.

비록 학부모 참관 수업이니, 운동회 등을 함께 하진 못했지만 두 모녀는 서로를 의지하며 남 부럽지 않게 지냈다.
은하는 같은 반 친구들이 부모님의 품에 안기고, 직접 싸온 도시락을 함께 먹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 광경들이 어린 나이에 서운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은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빈자리는 마음으로 메꿀 수 있다.` 어머니가 항상 하던 말이었다. 가족의 빈자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채울 수 있었다.



그러던 두 모녀에게도 이별은 한순간에 찾아왔다. 은하에게 저녁 식사로 돈가스를 직접 튀겨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어느 날 이른 저녁이었다.
어머니는 간단히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서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통사고를 당했다. 향년 30세. 짧았지만 긴 고난의 세월이었다.
추돌한 승용차가 멀어져 가며, 흩어지는 재료들을 시선에서 거두며.
 눈을 감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은 `미안해.` 였다. 아무도 듣지 못한 얘기였고, 유언은 소란스러운 좌중에 가려 사라졌다.
아름다웠지만 안타까웠던 그녀의 인생은 그렇게 까끌까끌한 아스팔트 위에 흩뿌려져 사라졌다.

은하는 늦어지는 어머니의 귀가를 얌전히 기다렸다. 오랜 인내심이 바닥날 법도 했지만 평소 힘들게 일하는 어머니를 보채고 싶지 않았던 기특함이 있었다.
배가 낮게 울리고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도록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약간의 의구심이 떠올랐던 은하는 이내 곧 돌아올 어머니와 돈가스 재료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부정적인 생각을 지워냈다.
얼마쯤을 기다렸을까. 문밖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뛰쳐나간 은하는 어머니였다면 도어락을 열고 들어왔을 텐데 하는 생각을 담지도 못한 채 활짝 웃은 얼굴로 외쳤다.

"엄마아아!"

은하는 입가에 가득한 미소와 함께 서둘러 도어락을 열었다. 
그러나 은하가 문을 열고 마주친 이들은 어머니의 부고를 전하러 온 경찰들이었고
그들이 그녀의 얼굴을 보자 왜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뒤로 5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날 직후 들어간 보육원은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원룸보다는 좋은 시설이었다.
의젓한 은하에게 있어서 보육원의 규칙적인 단체 생활은 그다지 어려울게 없었다. 원장은 까탈스러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선한 여성이었고 자기 일에 적당한 사명감도 갖춘 이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은하에게 부모님 같은 존재가 되어줄 수는 없었다. 영양가 높은 급식과 주기적으로 소독하는 침구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꿔줄 마음이 없었다.
다만 은하는 또래들과 달랐고 슬픔과 가슴앓이가 도움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체념했다. 적어도 이 따듯하고 포근한 잠자리는 현실이었으니까.
같은 아픔을 가진 또래 친구들도 그녀에겐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다. 감정을 내비치진 않았지만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었다.

그런 그녀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을 때쯤 후견인이 되어주겠다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은하가 입학할 고등학교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던 40대 후반의 남자였다.
원장은 의구심을 가득 품었고, 은하도 경계심으로 남자를 대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더욱이 그녀의 학교 이사장이 보육원에 직접 찾아오는 건 그리 좋은 결말을 내지 않는다 여겼기 때문이다.
몹쓸 수작을 부리려는 게 아닐까. 거절하면 은하에게 불이익이 생기지는 않을까. 원장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반기지는 못했다.

"아. 그래. 의심하는거도 당연합니다."

은하의 눈초리에서 경계심을 읽은 남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돌아선 남자는 차로 돌아가더니 낡은 졸업앨범을 들고 돌아왔다.

"은하, 라고 했지."

"...네."

은하는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원장 역시 눈초리에는 힘을 풀지 않았다.

"여기. 음... 그래. 아, 여깄다. 성은이."

남자가 앨범을 몇 차례 넘기다 이름을 꺼냈다. 어머니 이름이었다. 순간 은하가 움찔하며 원장을 바라봤다. 남자에게 어머니 이름을 알려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착하고.. 성실했던 애였어... 참 많이 닮았구나."

남자가 말을 이었다. 눈빛이 떨렸고 말에는 힘이 없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앨범을 펼쳐 보여주며 은하의 어머니를 가리켰다.

"제 첫 학생이었고, 첫 반장이었습니다. 벌써 20년쯤 가까이 된 얘기네요. 고3때... 은하를 가지고... 그 뒤로도 몇 번 소식은 들었습니다."

은하는 귀를 막고 싶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슬퍼졌기에 간신히 가슴에 묻어뒀기 때문이다.
이제는 메마른 감정이었다. 상기시킬 때마다 젖어드는 예전의 추억을 견딜 수 없었다.
은하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걸 깨달은 남자가 얘기했다.

"미안하다. 은하야. 그럴 생각은 아녔어. 다만…."

남자는 말을 이으려다 멈칫한 채 앨범을 덮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은하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우리 조카가 너랑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단다... 그 애를 아끼는 것 만큼... 너를 그냥 둘 수는 없었어... 이제 와 찾아온 것도, 아픈 생각 떠오르게 한 것도 미안하구나."

"찾아와주신 경위는 잘 알겠습니다."

원장이 눈에 힘을 풀며 말했다.

"그래도 본인 의사가 중요하죠. 어려운 발걸음 해주신 건 정말 감사드려요."

"괜찮습니다. 원장님. 그냥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남자는 은하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바로 결정하라곤 하지 않을게, 은하야. 다만 네 엄... 아니, 학교 이사장이기 전에 한 착한 학생의 담임이었던 사람으로..."

"...생각해 볼게요."

은하가 말을 자르며 얘기했다. 그만하라는 듯 약간의 슬픔과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래. 알겠다."

남자는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갔다. 그를 배웅하는 원장의 자세는 누그러졌지만 은하의 눈빛은 혼란스러움이 담겨있었다.

"늘 얘기했지만, 은하야."

원장은 은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녀의 손은 오랜 격무로 탄력이 없고 주름진 피부로 덮여있었다. 그래도 그녀의 어깨에 체온을 옮겨줄 만큼 따듯한 손이었다.

"네 생각이 제일 중요하단다. 저분 후견인으로 두고 싶지 않으면 잘 말해놓을게."

은하는 눈을 감았다. 원장의 온기 가득한 손을 느끼며 말했다.

"저만 후견인을 해주시는 건가요...?"

이미 남자의 선의를 충분히 믿은듯한 질문이었다. 원장이 반쯤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여기 친구들을 다 해주실 수는 없을 거야."

"그럼 걔네는 어떻게..해요? 저만 이렇게..."

걱정스러운 말투의 은하를 바라보며 원장이 웃었다.

"우리 은하. 정말 착하고 기특하고. 정말 사랑스러운 우리 은하."

원장은 은하를 꼭 껴안고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세상이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렇지? 근데... 그럴 수 없어... 너희가 그런 걸 알게 될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만...
저분은 너 하나만 생각하고 오신거야... 너의...어...머님. 그분 담임이셨던 일이 아녔으면... 이 자리도 없었을거고..."

원장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저분이 후견인이 되신다 해서... 네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좋은 기회긴 해. 원장님은 너 혼자라도 기회를 잡았으면 좋겠어."

보육원엔 불행을 딛고 자라나는 꽃봉오리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였던 은하는 같이 자라난 형제 자매들을 두고 차마 자신만 `선택`을 받고 싶진 않았다.

"제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망설이는 은하를 앞에 두고 원장은 따듯하게 미소 지었다.

"누구에게나 자격은 있단다. 은하야. 다만 행운이 따르던지. 인연이 겹치다 보면 남들보다 먼저, 더 많이. 행복할 수 있고."

"...네."

그날 밤. 은하는 잠자리를 뒤척이며 생각에 빠졌다. 옆자리에서 곤히 잠든 친구들을 바라봤다. 그들 역시 은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채 이곳에 온 아이들이었다.
미안함과 채울 수 없는 빈 마음에 대한 갈망에 휩싸였다. 어머니를 잃고 행복이란 감정을 접어둔 채 살아왔던 은하였다.
남자의 호의가 은하에게 당장의 행복을 가져다주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고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절망감 가운데,
그녀가 남겨놓은 인연이 아직 자신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 그 하나의 사실이 은하로 하여금 온몸에 기운을 돋게 하였다.



"후견인이 되어주세요."

다시 남자가 찾아온 날. 은하는 전보다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남자는 말이 없이 은하를 바라봤다.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은하에게 온갖 생각이 몰아쳤다. 저번의 일로 밉보였던 걸까? 이제 와선 후견인을 해 줄 생각이 사라진 걸까?
짧은 침묵이었지만 은하는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이윽고 남자가 눈을 감고 입을 뗐다.

"...정말..."

감격에 받친듯해 잔뜩 메인 목소리였다.

"성은이랑 정말 많이 닮았구나... 은하야..."

남자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눈가에 눈물이 언뜻 비치는 듯 했다.

"그래. 고맙구나. 날 믿어줘서."

그 날부터 남자의 호의는 알게 모르게 준비되었다. 당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은하에겐 보육원이 집이었고, 차마 가족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운 이들은 원장과 보육원의 친구들이었다.
가끔씩 보육원 전체에 익명의 피자와 치킨 세트들. 각각 입학을 앞두고 마치 입혀본 듯 알맞은 치수의 교복들이 은하의 친구들에게 보내져 왔다.
은하는 모른 체 했지만 남자의 분명한 호의라는 걸 눈치챘다. 첫 만남의 경계심이 무색하게도 남자는 그런 경계심을 받을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은하는 남자에게 조금씩이지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한가한 주말이 되면 남자는 원장실로 가끔 찾아와 은하에게 어머니 얘기를 꺼내며 격려해 줬다.
그는 절대로 혼자 은하를 불러내는 일이 없었다. 세간의 시선을 누구보다도 신경 쓰던 사람이었고, 자신이 잘못 처신하면 모두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걸 잘 아는 남자였다.
그렇게 반년이 지났다. 그 날도 남자가 원장실에 올 생각에 살짝 기분이 좋아진 은하는 발걸음을 가볍게 하며 원장실 밖을 기웃거렸다.

"...알겠습니다, 불러 올게요."

약간은 격양된 톤으로 원장이 말했다. 너머에서 듣던 은하는 평소와는 다른 원장의 목소리에 일순간 뭔가 잘못된게 아닐까 하는 불안에 휩싸였다.
문을 열고 나선 원장이 바로 앞에 서 있던 은하를 발견했다. 원장은 모른 체하며 원장실을 나서서 은하를 조용히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은하야. 원장님 말 명심해. 정말로. 혹시나 저분이나 다른 사람들이 은하 몸에 손대거나 하면 바로 싫다고 해야 해.
원장님은... 은하가 그런 일 당하는 건, 정말 원장님한텐...죽는거보다 슬픈 일이야..."

"네? 무슨... 말씀이세요? 왜요?"

원장은 아랫입술을 한번 깨물더니 대답했다.

"갑자기... 누굴 소개시켜 주겠다고... 잠깐 데려나가겠다고 하시는데. 평소 그런 적이 없으시잖니... 원장님이 나이가 들어서 노파심일 수도 있어.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은하는 눈을 질끈 감고 몸서리치는 원장을 꼭 안았다.

"아닐 거에요. 원장님. 믿어요. 아닐 거라구요."

감정이 벅찬 것인지 안심한 것인지 원장도 은하를 안고서 속삭였다.

"그래... 그럴거야... 내가 괜한 걱정이겠지. 좋은 분이셨으니까."

그 말대로. 괜한 걱정이었다. 염려가 무색하게도 은하에겐 아무런 위해가 없었다.

"인사해라. 니 동생, 은하. 여긴 네 오빠. 진현이다."

다만 한 사람이 은하의 `아는 사람` 명단에 올라갔을 뿐이었다.
진현과 은하를 양옆에 둔 채 삼촌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둘의 첫 만남은 꽤나 기름진 고깃집에서 시작되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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